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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8월 2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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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들이 대만과 수교한다면 우리는 바로 당신들과 단교(斷交)할 거요!”(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은 뒤 북한과 중국이 한때 험악한 상황까지 갔었다고 홍콩의 싱다오환추왕(星島環球網)이 27일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 특집’ 기사에서 보도했다.
북한은 한중 수교에 불만을 품고 대만과 수교하겠다고 중국을 협박했으나 중국이 되레 강경하게 나오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듬해 열린 중국 베이징과 호주 시드니 간 ‘2000년 하계올림픽’ 유치전에서 시드니에 투표해 중국에 복수했다고 이신문은 전했다. 당시 개최를 기대했던 베이징(北京)은 2표 차로 패했다.
다음은 보도 내용.
1980년대 초 한중 관계가 부드러워진 뒤 중국은 한국과의 ‘주요 대사(大事)’를 모두 북한에 사전 통보했다. 한중 수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북한에 어떻게 통보할 것인가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여러 차례 고심한 끝에 장쩌민(江澤民) 당시 총서기의 ‘구두 메시지’를 첸치천(錢其琛)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편에 평양으로 보냈다.
초대 주한 중국대사를 지낸 장팅옌(張庭延) 씨의 말에 따르면 첸 부장은 1992년 7월 15일 새벽에 전세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첸 부장에게서 메시지를 전달받은 김 주석의 태도는 매우 냉담했다.
광저우(廣州) 지난(기南)대의 린시싱(林錫星) 부교수가 발표한 ‘북한 핵 위기의 배후’에 따르면 김 주석은 외국 매체의 보도로 한중이 수교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뒤 노기충천해 얼굴색이 파래질 정도였다. 김 주석은 바로 “(그럼) 우리도 타이베이(臺北)에 사무처를 두는 등 보복조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국가였다. 덩은 개혁개방과 대만 문제를 해결하고,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서방의 경제 제재를 풀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수교를 최종 결정했다. 이는 북한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이었다.
북한의 보복 기회는 이듬해 찾아왔다. 북한은 1993년 9월 진행된 ‘2000년 하계올림픽’ 유치 싸움에서 시드니를 지지했다.
양국 관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좌에 오른 뒤 더욱 악화됐다. 북한은 중국의 개혁 충고를 거절했다.
탈북자 문제 처리와 관련해서도 북한은 중국이 많은 탈북자들의 한국행을 방치해 북한 정권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주변 대국도 결코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싱다오환추왕은 북-중 간에 우여곡절이 있지만 양국은 여전히 서로 의지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고 결론지었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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