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양극화해소 정책, 美 해밀턴 프로젝트와 유사”

  • 입력 2006년 6월 13일 03시 01분


《양극화 해소를 통한 동반성장 전략을 외쳐 온 정부가 ‘가뭄에 단비’ 같은 보고서를 만났다.

미국의 진보적 연구소인 브루킹스연구소가 4월 초에 내놓은 ‘해밀턴 프로젝트’가 그것. 미국 사회에서 경제성장의 과실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균등한 기회 보장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정책 개선 과제를 제시한 보고서다.

청와대는 12일 ‘보도 참고자료’를 통해 이 프로젝트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후반기 정책 과제를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해 이 보고서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이 보고서가 노 대통령이 제안한 ‘동반 성장 전략’과 맥을 같이하고 있어 양극화 해소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양극화 해소와 동반 성장 전략 등 참여정부의 정책기조가 세계적 공통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는 의미가 있다”며 “처음 이 보고서를 접한 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전략과 비전, 주요 개념이 너무나 흡사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성숙된 사회보장제도를 갖고 있고 막대한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미국을 한국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 이 정부의 단골 메뉴인 해외 모델 벤치마킹이 구체적인 정책의 뒷받침 없이 논쟁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 해밀턴 프로젝트 어떤 내용 담았나

해밀턴 프로젝트는 제대로 교육받고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미래를 성취할 수 있고 기회는 균등하다는 미국 사회의 발전 원동력이 깨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런 문제의 출발점은 재정적자. 미국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2.5%인 3000억 달러에 이르러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교육, 기술 등 투자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는 것.

이 보고서는 그러면서 △모든 계층을 위한 경제성장(Broad-based economic growth) △복지와 성장의 상호 상승 작용 △경제성장 촉진을 위한 효과적인 정부라는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를 위한 4대 정책 과제로 △교육 혁신을 통한 인적자원 투자 △우수한 이공계 전문인력 양성과 이를 위한 인프라 개선 △사회보험제도 개선을 통한 미래 불안 해소 △효과적인 정부를 통한 정부 역할 제고를 내놓았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우선 교사 평가 후 정년보장제도, 기업 퇴직연금 개선 방안, 저소득층 자녀 여름학교 등 3개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어 정부 내 생산성 평가제도와 납세제도 단순화 방안 등 2개 정책 보고서를 순차적으로 내놓아 공론화할 예정이다.

○ 정부가 반기는 이유

이 보고서는 4월 중순 재정경제부가 정리해 대통령비서실에 전달하면서 청와대의 눈길을 끌었다. 청와대는 이 보고서를 임기 후반 정책과제 수행에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이 보고서를 처음 접한 건 4월 중순. 대통령경제정책수석비서관실은 재정경제부에서 올린 이 보고서가 현 정부의 동반성장 전략과 흡사해 곧바로 노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보고서를 탐독한 뒤 지난달 초 대통령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이 보고서가 내놓은 정책 진단과 현상 분석을 우리의 정책지표와 비교해 정리하면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시사점이 될 것 같다”고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후 청와대 내 핵심 참모진도 이 보고서를 돌려 읽었다는 것.

이에 따라 청와대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해밀턴 프로젝트’ 전문을 꼼꼼하게 번역하도록 지시했고, KDI는 이달 중 해설을 곁들인 한글 번역본을 내놓을 계획이다.

○ 실천적인 대안 추진하는 게 우선

해밀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철학은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해소정책과 유사한 측면이 적지 않다. 하지만 양국이 처한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인 정책 입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구체적인 정책 입안과 실행력이 관건이라는 지적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막대한 재정적자 때문에 연방정부의 효율성 제고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연방정부 고용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우정청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경쟁체제를 도입하고 있는 스웨덴 뉴질랜드 독일 등을 언급했다.

하지만 한국은 양극화 해소를 위해 공공서비스 부문의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큰 정부론’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은 재정적자가 미국만큼 심각하진 않다.

기회의 균등을 통한 동반성장 전략도 구체적인 정책을 보면 차이가 보인다.

이 보고서는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을 통한 인적 투자로서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려는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소득층 자녀의 여름방학 중 학과 보충제도를 제안했다. 또 미국사회 불안의 핵폭탄으로 여겨지는 연금 및 의료제도 개혁을 강조했다.

이 보고서는 그러면서 ‘국민의 미래불안 해소’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양극화 대책으로 강조하는 사회안전망 구축에 구체적 대책을 내놓지는 않았다.

재경부 조원동 경제정책국장은 “이미 사회복지제도가 성숙한 사회와 이제 막 (양극화) 문제가 불거지는 한국과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최근 몇 년 동안 노사 간 사회협약모델로 ‘네덜란드 모델’과 ‘아일랜드 모델’, 사회안전망구축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스웨덴식 모델’ 등을 내세우며 외부에서 해법 찾기에 몰두해 왔으나 정책 효과는 낮았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해밀턴 프로젝트가 제시한 대원칙과 철학은 어느 정부나 갖고 있는 고민”이라며 “이를 사회이슈화하기보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실천하는 것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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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프로젝트는▼

해밀턴 프로젝트는 올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에 대비한 민주당 선거 전략의 일환이다.

해밀턴 프로젝트의 총괄책임자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현 씨티그룹 회장. 역시 클린턴 행정부 시절 각각 재무차관과 백악관 경제특보를 지낸 로저 앨트먼 씨와 피터 오스재그 씨가 실무 총책을 맡고 있다. 이 밖에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 조너선 그루버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등 진보 성향의 저명 경제학자가 대거 참여하고 있다.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미국 재무장관의 이름을 딴 이 프로젝트는 민주당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를 본부로 삼고 있다.

해밀턴 프로젝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 초 취임사에서 국내 경제정책의 키워드로 제시한 ‘오너십 사회(Ownership Society)’에 대한 ‘대항마’적 성격으로 출범했다. 오너십 사회는 의료 연금 교육 등의 분야에서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시장원칙에 따라 개인의 책임을 늘리는 것이 핵심 개념이다.

오너십 사회가 민주당과 시민단체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강한 비판을 받자 지난해 브루킹스연구소와 일부 민주당 의원이 해밀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해밀턴 프로젝트는 올해 들어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언론이 미국의 양극화 문제를 집중 부각한 것도 해밀턴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 줬다.

저소득층을 외면하는 바람에 2004년 대선에서 패했다는 자성론에 휩싸였던 민주당은 올해 중간선거를 의회 탈환의 호기라고 판단하고 해밀턴 프로젝트를 통해 양극화 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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