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조헌주]좀 더 고심했어야 할 ‘고심중’ 발언

  • 입력 2005년 6월 16일 0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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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간신문들이 15일 ‘한일 정상회담 20일 서울 개최’ 소식을 전하는 내용을 보면서 회담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개운치 않은 느낌이 더 앞섰다.

회담 일정 발표 소식을 아예 무시하고 한 줄도 보도하지 않은 일본 신문도 있었다. 일본 언론들은 벌써 몇 주 전부터 ‘20일 회담’을 ‘팩트(사실)’로 보도해 왔다. 이미 뉴스로서 흥미를 잃은 것이다. 일본 정부가 회담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속셈에서였을까. 일본 정부가 ‘20일 회담’을 흘리자 외교 관례를 벗어난 행태에 분개한 주일 한국대사관이 외무성에 항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일본 사정을 전제로 놓고 보면 한국 정부는 실상이야 어찌됐건 벌써 결정된 일정을 놓고 세상 고민 혼자 안고 있다는 듯이 국민 앞에 연극을 한 격이다. 일본 관객은 결론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런가 하면 한일 양국의 회담 일정 발표 몇 시간 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정당대표들과 오찬 모임을 갖는 자리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떤 주제로 할지 결정되지 않았고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한 일본 언론인은 ‘고심 중’이란 발언이 전해지자 “회담 연기라는 뜻”이라며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준이치로 총리의 정치생명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그랬다. 그런데 잠시 후 일정 확정 발표가 나오자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일본의 한 언론매체는 한일 정상회담을 해도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중단 발언과 같은 가시적 성과가 없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고뇌가 곧이곧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명색이 대통령이 ‘회담을 할지 말지’ 고심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20일 회담’ 발표가 이어졌으니….

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제주 정상회담 때 ‘과거사 불언급’ 원칙을 밝혀 일본 측의 ‘오해’를 샀다. 물론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이 아니었겠지만, 그 말뜻을 일본이 제대로 알아듣게 만드는 데에 몇 달이 걸렸다. 이번 정상회담 확정 발표 직전의 ‘고심 중’이란 말도 더 고심 끝에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조헌주 도쿄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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