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風에 열린우리 50% 육박…朴風-老風에 30%대로 몰락

  • 입력 2004년 4월 15일 17시 40분


‘바람’에 따라 총선 판세가 요동치면서 짧은 선거 기간에 정당 지지율은 새로운 변수가 출현할 때마다 큰 폭으로 진동했다.

이번 총선은 3월 12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과 함께 사실상 막이 올랐다. 이후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전국을 뒤덮으며 열린우리당은 지지율 50%대를 넘나드는 초강세를 보였다.

한나라당은 10%대, 민주당은 5% 이하로 지지율이 급락하며 탄핵 후폭풍에 울어야 했다. 열린우리당이 250석 이상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야당의 존립 위기론이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나라당이 추격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3월 23일 전당대회에서 박근혜(朴槿惠) 대표를 선출하면서부터. 한나라당은 24일 천막당사로 이전하면서 ‘거대여당(巨大與黨) 견제론’을 들고 나왔고, 영남권을 중심으로 ‘박풍’이 북상하면서 수도권 판세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의 기세가 확연히 꺾인 것은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훼’ 발언이 알려진 4월 1일부터다. 이후 열흘 사이에 열린우리당 지지도는 10%포인트 이상 빠진 반면 한나라당은 꾸준히 지지율이 올라 두 당의 격차는 한 자릿수로 좁혀졌다.

이 같은 두 당의 혼전을 틈타 민주노동당은 정당지지율을 두 배로 끌어올려 15%에 육박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이탈표를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나눠가지는 형국이었다.

‘노풍(老風)’은 박풍을 타고 위력을 더해갔고, 이 즈음에 터진 친노(親盧) 인사인 문성근(文盛瑾) 명계남(明桂男)씨의 ‘분당론’ 발언은 열린우리당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

고사 위기로까지 내몰렸던 민주당도 4월 3일부터 사흘간 추미애(秋美愛) 선대위원장이 ‘3보1배’의 고행에 나서면서 호남을 중심으로 접전지역을 넓혀갔다. 10일 조사에서는 오랜만에 지지도 5%를 회복했다.

정 의장은 탄핵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대표회담을 잇달아 제의하기도 했으나, 이라크 상황의 급변과 함께 총선 주요 변수로 떠오른 파병철회론에 묻혔다. 이 무렵 열린우리당에서는 ‘거대야당 부활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앞서가던 수도권 곳곳에서 접전지역이 늘어나자 정 의장은 선대위원장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지기에 이르렀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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