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필 대변인의 답글 전문

  • 입력 2003년 10월 22일 11시 44분


코멘트
존경하는 이기명 회장님!

언제나 자상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20대 청년 같은 열정을 간직하고 계시는 회장님, 저에 대한 공개서한 잘 보았습니다. 여러 충고의 말씀 감사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체는 '유종필이 노무현 대통령을 배신했는가, 반대로 노 대통령이 배신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당과 지지세력, 즉 민주개혁세력을 둘로 쪼갰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 당을 반(反)개혁적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지지자들을 지역감정의 포로인양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정치사상 최고 최악의 배신을 감행한 것입니다.

지난 2001년 6월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무렵 어느 날 저는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과 여의도 금강빌딩 내 사무실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그 때 회장님께서도 배석하셨지요. 저는 사전에 준비한 말을 또박또박 꺼냈습니다. "저는 기능을 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혼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언론특보로 일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그 분과 별 인연이 없었습니다. 연초 어느 월간지에 실린 꽤 긴 인터뷰 기사를 읽고서 제 생각과 거의 다른 점이 없음을 느꼈고, 그동안 정치 행적과 언행을 볼 때 정직·순수, 이런 것들의 냄새가 나는 점에 호감이 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이 내세우는 '동서화합 국민통합'의 기치는 저를 강한 자력(磁力)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저 자신을 던진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분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동서화합 국민통합을 지향하는데 감명 받았기 때문입니다.

2002년 3월 16일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예상을 깨고 노 후보가 1위를 차지했을 때 저는 노 후보와 부인께 즉석에서 제안하여 무대에서 광주 시민을 향해 함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 그토록 이루려 했으나 이루지 못한 동서화합 국민통합이 이제 영남 출신의 노무현에 의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감에 가슴 벅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많은 국민이 광주경선에 감동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민주당의 분당 사태는 광주경선을 만들어낸 광주시민에게나, 광주경선 결과에 감동받은 많은 국민들에게나 쓰라린 배신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지역과 특정정당에 대한 배신의 차원을 넘어선 동서화합 국민통합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 기회에 분명히 밝힙니다. 첫째, 저는 노무현 개인에게 충성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지향하는 가치, 즉 동서화합 국민통합에 충성했습니다. 금강캠프 시절 그분께서 "우리 캠프는 어느 캠프보다 로열티가 강하다, 노무현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라고 자랑스레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둘째, 저는 그 분이 민주당의 노무현이기 때문에 도운 것이지, 다른 당이거나 무소속이었다면 제가 그 분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노 대통령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그 분이 갑자기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노선이 달라진 것입니다.

지난 90년 3당 합당 때 노무현 의원은 YS와 같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YS가 갑자기 다른 길로 갔습니다. 노 의원은 '옳지 않은 길'이라며 YS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이 배신자입니까, YS가 배신자입니까?

사랑의 배신, 사업상 배신, 정치적 배신…. 아름다운 배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필부의 배신은 용서를 구해볼 수 있지만, 정치인의 배신은 사면복권도 되지 않습니다. 서양 속담에 배신자의 이름은 대리석에 새겨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가슴 쓰리고 뼈저리고 뇌리에 박힌다는 뜻이겠지요.

회장님께서 얼마 전 저의 방송 인터뷰를 들으시고 전화를 걸어와 "배신이라는 말을 꼭 사용해야 하느냐, 뭘 저버렸다는 식으로 풀어서 말할 수 없겠느냐?"라고 말씀했을 때 저는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단어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회장님이나 저나 모두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배신'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노 대통령께서 "배신이라는 말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을 때도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배신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당의 핵심인사들이 대선이 끝나자마자 "노무현의 당선은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무현의 승리" 라고 말했을 때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잘못된 인식이 민주당의 분당을 통한 신당 만들기로 결말지어졌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신당을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 노 대통령의 '입'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라도 어지간하면 신당에 참여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워낙 명분이 없기에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략의 기본은 우리쪽은 단결시키고 상대쪽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쪽을 쪼개는 전략은 손자병법에 있습니까, 할아버지 병법에 있습니까? 아니면 대체 어느 병법에 나오는 전략입니까? 전국정당을 만들기 위해 당을 깨야 한다면 한나라당을 깨야지 왜 엉뚱하게 민주당을 깹니까?

저는 한때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분의 정치 행위를 배신이라는 치명적 어휘를 동원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분은 이 나라의 최고권력 국가원수입니다. 제가 아무리 소신과 확신과 명분을 갖고 하는 행위라고 해도, 제가 아무리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찌 내면의 떨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저의 운명입니다. 제가 만든 운명이거나 제가 선택한 운명이 아닙니다. 강요된 운명입니다. 누가 저에게 이 유쾌한지 못한 운명을 강요했나요?

존경하는 이기명 회장님!

노 대통령의 측근을 자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회장님을 따를 사람은 없습니다. 5000만이 노 대통령에게 돌을 던질 때 마지막 한 사람 몸을 던져 대신 맞아줄 사람은 바로 회장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회장님의 그런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요즘의 회장님을 보면서 맹마청령(盲馬聽鈴: 눈 먼 말이 방울소리만 들으며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좌든 우든 천당이든 지옥이든 무비판적으로 따라만 간다면 3김시대의 가신(家臣)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금강캠프 시절 그리던 노무현 대통령과 노무현 정부의 모습은 현재와 같이 지리멸렬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대선 이후 9개월 동안 야인(野人) 신분으로 관악산 골짜기에서 파묻혀 지내온 제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그 기간 동안 진실도, 열정도, 성실도, 순수도, 겸손도 모자란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회장님을 비롯한 측근들도 마찬가지로 보였습니다.

중국 격언에 노인 3명에게 물어보고 일을 하면 실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노인의 지혜와 신중함을 말하는 거겠죠. 회장님께서 부디 노무현 대통령 곁을 지키는 '노인 1명'의 역할에 충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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