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核폭풍'에 평화공존 퇴색

  • 입력 2003년 6월 13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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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약속한 6·15공동선언은 그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개발과 정상회담을 둘러싼 대북 송금 특검으로 빛이 바래고 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남북장관급회담이 계속 열리고 있고, 이를 통한 각종 교류협력도 새롭게 합의되고 추진돼 왔다는 점에서 6·15공동선언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6·15공동선언으로 이룬 성과=6·15공동선언은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했다. 6차례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이산가족 6210명이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민간차원의 독자적인 생사 및 주소확인 작업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2002년 말 현재 확인된 3356건 가운데 민간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1687건에 이른다.

공동선언 4항에 따른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현재 5차례에 이르는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 특히 경의선 동해선 철도 연결을 추진함으로써 경의선은 올해 9월, 동해선은 12월 개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철도 연결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연결뿐 아니라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군사실무협력을 거쳤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남북 교역도 2000년 4억달러를 돌파한 뒤 지난해에는 6억4000만달러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정상회담 합의사항 5개 중에서 3개 사항은 비록 진도의 차이가 있지만 남북이 합의사항 이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공동선언 합의사항 중 이행 안 된 분야=6·15공동선언 가운데 불발된 가장 큰 사안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이다. 남북 정상회담이후 최대 관심사의 하나였던 김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위해 남북은 2000년 12월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먼저 서울을 방문한 뒤 답방을 추진키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으나 북한은 ‘남측의 환경조성 미비’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내세우며 피해나갔다. 이는 북한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공동선언 가운데 실질적인 진전이 없었던 또 하나의 분야는 통일문제를 다룬 1, 2항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이상 협의가 없었던 게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공동선언 2항인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공통성 인정 및 통일지향 부분은 연방제 통일합의라는 논란을 일으키며 국내의 혼란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 성장한 남북 교류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진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남기고 있다. 남북은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상설면회소 설치에 합의했지만, 규모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4월로 예정됐던 착공식을 열지 못했다. 북한측은 이 과정에서 신라호텔의 전경이 들어있는 팸플릿을 남측 대표들에게 보여주며 똑같은 방식의 건물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아직은 이산가족 상봉이 1회성 행사에 그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또 남북 긴장완화의 신호탄으로 여겨졌던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1차 회담을 가진 뒤 후속 회담을 열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움직임은 남북간의 평화적 공존을 합의한 공동선언과 배치된 행태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핵개발은 공동선언 정신의 훼손뿐 아니라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며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서는 것이 공동선언의 정신을 되살리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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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달라진 상호인식▼

‘북한엔 통일을 위한 금과옥조이자 한국을 민족공조의 틀에 붙들어 둘 수 있는 효과적 수단. 한국엔 북한을 보는 시각 전환의 계기. 그러나 남남갈등 속에 북한 핵 위기 및 대북송금사건 특검수사로 역사적 의미는 다소 퇴색.’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간 만남의 결과물인 6·15공동선언을 보는 남북한의 시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유일체제’인 북한에선 최고지도자인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직접 서명이 담긴 공동선언은 절대시되고 있다. 동국대 북한학과 고유환(高有煥) 교수는 “북한에선 최고지도자의 결정은 반드시 관철한다는 내부 동의가 있다”며 “이에 따라 공동선언을 ‘통일의 바이블’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백영철(白榮哲) 교수는 “북한학자들을 만났을 때 공동선언에 민족자주는 거론됐지만, 한반도 평화문제가 누락된 점을 지적하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고 소개했다.

북한이 공동선언에 집착하는 이유는 “통일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공동선언 제1항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이 조항을 근거로 과거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에서 벗어나 통남통일봉미(通南通日封美)로 옮겨가고 있다.

‘한국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대남관도 달라졌다. 휴전선이 내려다보이는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관계자는 11일 기자에게 “북측 대남방송의 내용이 비방 위주에서 한국을 통일의 상대로 인정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 같은 변화기조와 함께 한국 정부에서 지난해와 올해 비료 20만t씩과 쌀 90만t(지난해 50만t, 올해 40만t)을 챙겼고 한국 정부와 개성공단 투자를 논의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동용승(董龍昇) 북한연구팀장은 “북한은 정상회담 직후엔 공동선언 가운데 자주 민족공조를 강조한 1, 2항을 중시하다가 지금은 교류 및 협력을 의미하는 3, 4, 5항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을 지켜보면서 “(체제보장이건 경제지원이건) 믿을 것은 한국뿐이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지적이다.

6·15선언은 한국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00년 여름 ‘김정일 신드롬’이 번진 이후 과거처럼 색안경을 끼고 북한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6·15선언 이후 북한을 보는 국내 시각의 양극화는 더 두드러져 남남갈등 단계에 이르렀다”(경남대 북한대학원 최완규·崔完圭 교수)는 진단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14일 6·15선언 3주년을 맞아 발표한 성명에서 “노무현 정부는 이념적 접근이 아닌 실사구시 자세로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북한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통일연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 재야단체는 “노 대통령이 6·15선언의 정신을 경시하고 있어서 아쉽다”는 180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여하튼 3년 전 한국사회를 달궜던 6·15선언은 현재로선 그 의미가 줄어들었다. 북한의 핵개발 시인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북한 제재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고, 대북송금 의혹에 대한 특검수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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