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부 '책임총리제' 제대로 돼가나]'이름뿐인 책임총리'

  • 입력 2003년 4월 14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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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고건 국무총리가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4대 국정과제 추진기획단 현판식에 나란히 참석했다. -김경제기자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고건 국무총리가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4대 국정과제 추진기획단 현판식에 나란히 참석했다. -김경제기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공약인 ‘책임총리제’ 이행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나라당은 고건(高建) 국무총리가 그동안 책임총리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나 청와대와 총리실은 아직 준비단계라는 입장을 보였다. 참여정부 한 달 반 동안의 총리 역할에 대한 청와대와 총리실, 정치권의 평가를 알아본다.》

▼총리실 시각▼

국무총리실은 책임총리제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는 입장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달 반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총리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강화됐는지를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지금은 국정의 큰 틀을 잡아가는 과정”이라며 “아직까지는 제대로 바뀌지 않았으나 국민에게 책임총리제를 약속한 만큼 자리를 잡도록 한다는 자세로 국정에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 역시 “장관이 청와대에 보고하기 전에 먼저 총리에게 보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다 할 사례를 집어내기 어렵다”며 “지금은 완성 단계가 아니라 총리실 강화를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새 정부가 내건 책임총리제는 자리를 잡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건도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최근 국무총리실 소속의 차관급 부처인 국정홍보처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통합브리핑룸 설치를 추진하면서 고건(高建) 총리에게 별관(외교통상부 청사) 설치 계획을 사전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총리실 역시 이에 대해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 총리가 신문기사를 보고서야 별관 통합브리핑룸 설치계획을 알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름뿐인 책임총리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총리실을 담당하는 기자실까지 포함된 통합브리핑룸 계획을 고 총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도 고 총리의 가이드라인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홍보처가 독자적으로 진행한 것은 책임총리제 유명무실론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분석이다.이 같은 시각을 의식한 듯 총리실측은 “총리에게 사전보고를 하지 않고 통합브리핑룸 계획을 추진한 것은 유감이지만 책임총리제와 상관없지 않느냐”며 “따로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총리실은 총리실 위상 강화 차원에서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 아래에 차관급 두 자리를 신설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 중이다. 그러나 조직 확대만으로 책임총리제가 구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석준(金錫俊)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기에도 국무조정실장이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됐지만 오히려 총리 역할이 약화됐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기구를 확장한다고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청와대 조직이 더 확대됐기 때문에 총리실은 기구가 늘어나도 실제로는 약화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내각 구성에 있어 총리가 형식적인 각료제청권만을 행사하고, 대부분의 국무회의를 대통령이 주재하는 상황에서는 책임총리제가 구현될 수 없다”며 “대통령이 실질적인 권한을 총리에게 위임하고 총리도 헌법에 보장된 권한을 행사하려는 강단이 있어야 책임총리제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청와대 입장▼

청와대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책임총리제 약속이 이행돼 가고 있으며 앞으로 헌법에 보장된 국무위원 제청권과 내각통할권 등 총리의 권한이 완벽하게 보장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취임 초 한 달 반 동안은 노 대통령이 각 부처의 현안 파악을 위한 업무보고를 차례로 받는 바람에 마치 모든 국정을 대통령이 직접 관장하는 것처럼 비쳤으나, 이제부터 국정의 일상 업무는 대부분 고건(高建) 국무총리에게 위임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새 정부의 조각(組閣)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고 총리가 두 차례 만나 장관 인선 문제를 협의하는 등 역대 어느 정부보다 총리의 장관 제청권도 보장했다고 말하고 있다.

유인태(柳寅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고 총리를 총리로 지명한데 서부터 책임총리제를 실현하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며 “총리의 역할 강화를 통한 국정조정력 발휘 방안을 마련하는 작업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14일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에서 “각 부처의 일은 장관에게, 정부의 일은 총리에게 맡기고 나는 국가전략과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노 대통령 자신은 앞으로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정부혁신 및 지방분권위원회,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등 ‘대통령의 정책’을 펼 중장기적인 국가적 프로젝트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문희상(文喜相) 비서실장 주재 아래 총리실과 청와대 업무의 조정 문제를 제도적으로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총리실과 청와대간에 상당수 업무가 중복되는 데다 청와대의 국정상황 파악이 자칫 ‘옥상옥(屋上屋)’으로 비치기 쉬운 만큼 적절한 업무의 경계선을 찾아보라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특정 주제를 놓고 관계 장관들이 참석하는 ‘테마 국무회의’ 외에 일반 국무회의는 고 총리가 주재토록 하고, 국무조정실에 차관급 2명을 두는 등 총리의 위상강화를 위한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與野 평가▼

노무현(盧武鉉) 정권의 책임총리제 실험을 바라보는 여야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나라당은 현 정부의 책임총리제 공약이 ‘구두선(口頭禪)’에 그쳤다고 평가절하했다.

노 대통령이 검사나 노조를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이는 등 국정의 전면에 자주 나서는 상황에서 총리에게 실질적 권한을 부여한다는 책임총리제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고건(高建) 국무총리가 국정홍보처의 통합 브리핑룸 별관 설치 계획에 제동을 건 것을 현 정부가 내세운 책임총리제의 ‘허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꼽았다.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은 14일 “이렇게 총리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취급한다면 노 대통령의 책임총리제 공약이 대통령의 국정경험 부족과 이념 편향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일시적으로 호도하기 위한 기만 술수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대통령은 이제부터라도 모든 일을 직접 챙기려는 무모한 욕심을 버리고 국민에게 약속한 책임총리제를 실천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민주당에선 유보적 반응이 대세였다. 정국 운영에 있어 다소 어수선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집권 초기이고 기존 관행과 풍토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 않느냐는 상황 논리를 폈다.

이강래(李康來) 의원은 고건(高建) 총리가 ‘통합브리핑룸 재검토’를 지시하는 등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해 “청와대측과 총리와의 힘겨루기나 갈등 차원으로 볼 필요는 없다”며 “고 총리가 노 대통령의 ‘보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 해석했다.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총리는 안 보이고 대통령만 보인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한 재선 의원은 “고 총리의 국회 답변을 보면서 무척 답답했다”며 “자기 소신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자기 입지를 스스로 조성해 나가는 것이 노 대통령을 도와주는 길이다”고 말했다.

한편 신주류측의 한 인사는 “지난해 대선 당시 행정수도 이전 공방이 치열할 때 고 총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책임총리를 제안했는데 고 총리는 지원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따라서 고 총리는 ‘책임총리’가 아니고 그냥 총리다”며 “고 총리는 ‘조용히’ 내각을 운영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고건 국무총리-부처 이견 사례▼

#사례1

3월 20일 조영동 국정홍보처장, 고건 총리에게 통합브리핑룸 도입 계획 보고. 고 총리, “취재보장 및 국민의 알 권리 충족 등을 사전에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

4월 9일 홍보처, 정부중앙청사 별관에 5개 부처 통합브리핑룸 설치 계획 발표

10일 고 총리, 언론보도 통해 별관 통합브리핑룸 설치 계획을 알고 홍보처장에게 정식 보고 지시

12일 고 총리, 별관이 아닌 본관에 통합브리핑룸 설치 방안 마련토록 지시

#사례2

3월 12일 고 총리, “경제상황을 감안해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에 대한 일제조사를 유보, 연기하겠다”

13일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개혁엔 속도조절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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