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부 첫날부터 국회 파행

  • 입력 2003년 2월 25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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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비밀송금 특검법안부터 처리하자.”

“고건(高建) 국무총리후보자 임명동의안부터 처리하자.”

25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 첫날부터 국회는 파행했다. 특검법안을 먼저 처리한 뒤 총리 임명동의안을 처리하자는 한나라당의 주장과 임명동의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민주당의 반대가 계속 맞서자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은 직권으로 본회의 소집을 유보시켰고, 총리임명동의안 처리 문제는 26일로 미뤄지고 말았다.

한나라당이 특검법안의 명칭과 기간을 수정할 수 있다고 제의하고, 민주당 일각에서도 임명동의안만 처리해주면 특검법안의 본회의 상정을 물리적으로 막지는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때 진전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안건을 먼저 처리할지를 놓고 한나라당 이규택(李揆澤), 민주당 정균환(鄭均桓) 총무가 수 차례 공개, 비공개 접촉을 가졌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임명동의안을 처리해줘도 특검법안을 저지할지도 모른다”며 민주당을 불신했고, 민주당 내에서도 특검 수용론과 반대론이 맞서는 등 갈팡질팡했다.

이 때문에 이날 오후 4시 국회 로텐더홀에서 노 대통령과 외국 사절단 및 국회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취임 축하연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한나라당▼

25일 오후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 도중 이규택 총무(왼쪽)가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에게 민주당쪽 움직임을 보고하고 있다. -안철민기자

한나라당은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의사일정을 변경해 특검법안을 임명동의안에 앞서 통과시킨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새정부 출범일에 ‘발목잡기’를 한다는 비난 여론을 의식해 민주당쪽의 입장을 일부 반영해 특검법안의 명칭과 기간을 조정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에 민주당이 “특검법안 처리를 막지 않을테니 임명동의안을 먼저 처리하자”고 제안해오자 다시 당론 조율에 나섰다.

이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은 두 안건 처리 방법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으나 대다수는 “민주당을 믿을 수 없다”며 원칙대로 특검법안을 먼저 처리하자고 목청을 높였다.

홍준표(洪準杓) 의원은 “특검법안을 나중에 처리할 경우 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나가버리면 단독 처리하는 모양새가 된다. 국회법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취임 축하연이 끝난 뒤 오후 5시 본회의 개회를 기다리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 민주당 정균환(鄭均桓) 원내총무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의 소집을 하루 미루자 원내총무실로 몰려와 “의장이 일방적으로 본회의를 유회시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강하게 반발했다.

김황식(金晃植) 의원 등 10여명의 의원들은 “박 의장의 회의 진행에 문제가 있다. 의장 불신임을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에 이규택(李揆澤) 총무는 “오늘은 잔칫날인 만큼 우리도 안건을 강행처리하는 데 부담이 있어 양보했다. 미처 의원들에게 알리지 못했다”며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민주당▼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직후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장에서 정균환 총무(오른쪽)가 정대철 대표에게 본회의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민주당은 이날 원내대책회의와 의원총회를 잇따라 열어 특검법안과 임명동의안의 분리 처리 방침을 고수했다.

정대철(鄭大哲) 대표는 의총에서 “특검법안 처리는 대화를 통해 해야지 굳이 오늘 해야 할 이유 없다”며 “새 자동차가 시동도 걸기 전에 길을 막고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새 자동차가 길을 잘못 들 때 바로잡아 주면 겸허히 듣겠다”며 한나라당의 태도를 비난했다.

민주당은 이후 2시간에 걸쳐 비공개 회의를 갖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도 “임명동의안을 먼저 처리하고 특검법안은 오늘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므로 다시 논의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일부 의원들은 임명동의안 처리 후 특검법안 협상 때 특검 기간을 2개월 정도로 단축하고 수사 내용을 공개할 경우 처벌 조항을 둬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검을 수용하면 남북관계는 다 망가진다”며 특검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고, 일부에선 “특검이 통과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등 강경론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한편 의총 도중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 김상현(金相賢) 김원기(金元基) 김태식(金台植) 의원이 박관용 국회의장을 찾아가 “그동안 특검이나 국정조사 등은 모두 여야 합의로 처리해왔다. 총리임명동의안은 오늘 꼭 처리해야 하지만 특검법안 처리는 그렇게 급한 게 아니지 않느냐”며 국회의장이 중재에 나설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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