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5억 北송금]청와대 뒷거래은폐 사과조차 없다

  • 입력 2003년 2월 2일 18시 49분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임동원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지난달 29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임동원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지난달 29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DJ 책임론 대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대북 송금 관련 사실을 시인한 것을 계기로 그동안 청와대측이 한사코 이를 부인한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청와대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우선 청와대는 대북 송금이 남북화해협력을 위한 것이었다는 취지만 강조할 뿐 구체적인 송금 과정 등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목적이 정당한 만큼 절차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민주주의의 근본인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 초법적 태도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난해 9월 25일 한나라당이 2000년 6·15정상회담 직전 현대그룹을 통한 대북 비밀지원 의혹을 처음 제기한 이후 청와대가 보여준 부인 일변도의 태도다.

당시 국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자 박선숙(朴仙淑)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현대의 관련 계좌를 추적하면 사실 여부가 드러날 텐데 계좌추적을 회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한나라당측의 지적에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은 10월 1일 청와대 직원 월례조회에서 “법적 근거도 없는 계좌추적이나 장부 공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 발언은 청와대가 “계좌추적을 하지 말라”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청와대가 계좌추적을 막은 것은 당초부터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기도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당시 “계좌추적을 하면 현대가 망한다. 우리나라에서 내부자거래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재벌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해 이 문제를 ‘정부와 무관한, 민간 기업의 문제’로 떠넘기려는 태도를 보였다.

청와대측은 나아가 문제제기를 한 한나라당측에 대해 “대선 승리에 집착해 허위사실을 퍼뜨리며 대통령 흠집내기로 일관하고 있다”고 역공을 퍼붓기까지 했다.

이처럼 거짓과 은폐, 책임 떠넘기기로 일관한 청와대의 태도를 두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경우 선거 때 상대 후보측을 도청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사후에 이를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북 송금이 남북화해협력을 위한 것이었느냐는 정치적 판단과는 별개로, 청와대로서는 최소한 그동안의 ‘은폐시도’에 대해 대국민 사과 등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청와대 내에서도 “차라리 지난해 처음 문제가 제기됐을 때 솔직하게 사실을 인정했으면 국민적 이해를 구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는 탄식의 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검찰 수사 과제

현대상선의 2235억원 대북 지원과 관련해 검찰의 본격 수사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검찰의 일부 간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문제’로 판단하고 있지만 국민적 의혹 해소를 위한 검찰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검찰 수뇌부는 고심을 거듭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수사전망=검찰은 의혹 규명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이를 검찰 수사로 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검찰은 범죄 혐의를 밝혀 기소하는 곳이지 의혹 해소 기관이 아니다’라는 내부 의견과 사건의 특성상 검찰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남은 의혹’에 대한 특별검사 재수사 등의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사법심사 부적절’ 입장 표명에 이어 2일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가 “대북 지원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밝힌 것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북 송금이 사실상 불법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큰 데다 “정부가 북한에 단돈 1달러도 준 게 없다”는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의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증언을 문제삼은 국회차원의 고발 사건이 검찰에 접수될 가능성도 높다. 이럴 경우 검찰이 ‘떠밀리듯’ 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게 될 전망이다.

▽밝혀야 할 내용=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할 경우 수사의 핵심은 △북한에 건네진 돈의 성격 및 전달 경로 △전달 과정에서 청와대나 국가정보원의 편의 제공 등 그 역할을 밝히는 것.

특히 민간차원의 남북경협 자금으로 돈이 전달됐는지, 아니면 정부가 남북회담 대가 등 다른 명목으로 돈을 제공하면서 현대를 창구로 이용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주요 수사 사항 중 하나로 꼽힌다. 사업자금으로 밝혀질 경우 단순히 송금 과정의 불법 행위만 문제가 되겠지만 정부 주도 아래 대출과 대북 지원이 이뤄졌다면 국익(國益) 차원의 통치행위 여부 및 불법적인 국고 지원에 따른 법적 책임 유무 등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2235억원이 모두 북한으로 간 것인지를 조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현대상선의 대출 및 대북 지원 과정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행위에 대한 위법성 검토 및 통치행위 판단 여부가 검찰의 다음 과제로 남게 된다. ‘선(先) 실체 규명’에 이은 ‘후(後) 법적 판단’이라는 더욱 골치 아픈 과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통치행위 인정되나

현대상선의 2235억원 대북 송금 파문에서 불거져 나온 ‘통치행위’는 무엇이고 그 인정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일반적으로 ‘통치행위’ 이론은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정치적 통제수단이 따로 마련돼 있는 고도의 정치결단적 국정행위에 대해서만 사법부 스스로가 사법심사를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고 정당성 있는 통치기관의 국정행위여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법조계와 학계 등에 따르면 전제군주 시대에 군주의 책임을 면책해 주기 위한 근거로 주로 사용된 ‘통치행위’ 이론은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현대에서는 개념 자체가 축소되거나 부정되는 추세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명지대 허영(許營) 교수는 “통치행위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헌법 재판이 보편화되면서 인정되지 않는 추세”라며 “통치권자의 모든 국정행위는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인 만큼 통치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구시대의 헌법 이론을 끌어들여 면책을 받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또 “헌법재판소의 최근 결정에 따르면 ‘모든 국정행위는 헌법재판의 대상이 된다’는 취지이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한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 문제도 통치행위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외국의 경우 과거 동독의 탈출자에 대한 발포명령과 살인 혐의로 1992년 기소된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서기장의 재판 과정에서 통치행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으나 독일 사법당국이 호네커 전 서기장을 재판에 회부한 전례가 있다.

반면 독일 통일 직전 서독에서 동독으로 거액의 지원금이 전달됐지만 이 사안은 아예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독일의 경우 대동독 지원금이 여야 정치권과 동서독 지도자의 사전 동의아래 지급됐기 때문에 밀실에서 이뤄진 현대상선의 경우와는 그 차원과 성격이 다르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법조계 시각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에 대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사법심사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히면서 이번 사안에 대한 통치행위 인정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남북한 양측 정부가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번 사건에 대해 법학자들과 법조계는 일단 ‘통치행위’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먼저 법조계가 이 사건을 통치행위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이유는 현재까지 표면적으로는 현대상선이 자체적으로 2235억원을 북한에 비밀 지원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통치행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

따라서 민간기업의 ‘행위’를 두고 대통령의 통치행위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처음에는 대북 지원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던 정부가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에 발맞춰 ‘통치행위’라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특히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닌 민간기업의 행위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다”고 언급한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만큼 국정조사나 검찰 수사를 통해 먼저 실체적 진실을 밝혀낸 뒤 사법심사 대상인지를 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해오던 정부의 행태를 감안할 때 그냥 넘어가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라는 지적도 있다. 적어도 정부측이 실체적 진실을 국민에게 솔직히 밝히는 일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대 법대 배종대(裵鍾大) 학장은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통치행위’를 전제로 사법심사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다”며 “수사 대상 여부는 검찰이 판단하고, 사법심사 대상이 될 것인지는 사법부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변호사협회 하창우(河昌佑) 공보이사는 “대북 지원 의혹을 줄곧 부인해오던 정부가 아무 설명 없이 통치행위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모든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조순형 "통치행위는 독재정권 논리"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고언(苦言)을 서슴지 않아 온 민주당 조순형(趙舜衡) 의원이 2235억원의 대북 송금 파문과 관련해 청와대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측에게 또다시 ‘쓴 소리’를 했다.

조 의원은 2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감사원이 2235억원의 구체적인 용도를 밝히지 못한 것은 현대상선측의 자료를 제대로 감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라며 “진실이 규명되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통치행위 운운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조 의원은 또 “통치행위론은 과거의 독재 정권에서나 통용됐던 법 논리”라며 “통치행위로 인정받으려면 해당 행위가 사법적으로 적절했는지 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다.

그는 또 이날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가 ‘2235억원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관련해서도 “노 당선자가 이 문제를 포함한 국민적 의혹 사건을 검찰이 정치적 고려없이 수사해야 한다고 천명해 놓고 주변에서 정치적 협상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또 “덮어 버리려다가 김대중 정부에 치명상을 줬던 ‘옷 로비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철저한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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