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대선후보 검증]"부하에 너무 엄해…리더십 부친 닮아"

  • 입력 2002년 9월 18일 19시 00분


80년대 초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면담 중인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 - 박성원기자
80년대 초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면담 중인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 - 박성원기자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스스로 “뼈대는 경제인이고, 피는 정치인이며, 팔다리는 체육인”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리더십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세 가지 면모를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검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체육인 경영인으로서의 그의 리더십을 검증한다.

‘월드컵 4강 신화’의 달성이 그의 리더십이 이뤄낸 결과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체육계에서는 그의 열정과 몸에 밴 국제감각이 월드컵 유치와 성공적 개최에 큰 동인(動因)이었다는 점만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93년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기 이전부터 대한양궁협회장(83년) 실업테니스연맹 회장(84년) 등을 지내며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81년 당시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이던 부친 정주영 회장의 올림픽 유치활동을 도왔던 경험은 훗날 월드컵 유치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글 싣는 순서▼

- <上>성장기와 가족사

정 의원은 축구협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2002년 월드컵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이미 4년 전부터 유치운동에 나선 일본을 상대로 유치전에 뛰어든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대세였으나 그는 현대그룹 조직까지 적극 동원해 총력전을 폈다.

가삼현(賈三鉉) 대한축구협회 국제국장은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이 거주하던 브라질 상파울루,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등에는 일부러 현대 지사를 설립해 홍보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현대라는 조직에만 의존하지 않고 391일간 150만㎞를 돌며 사람을 만나는 강행군을 했다. 특히 94년에는 불리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FIFA의 아시아담당 부회장에 당선돼 월드컵 유치의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 월드컵을 앞두고는 거듭된 부진으로 경질여론이 높았던 거스 히딩크 축구대표팀 감독을 끝까지 신뢰해 유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계 일각에서는 그의 ‘독선적 리더십’을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앞두고 월드컵 조직위가 홍보 차원에서 글로벌 콘서트를 기획해 이연택(李衍澤) 공동위원장의 결재까지 받았으나 정 의원의 반대로 무산된 것이 단적인 예로 꼽힌다. 조직위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자신이 지시한 사항에 대해 아랫사람이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정 의원측이 FIFA 서열을 내세워 이연택 공동위원장을 배려하지 않았던 것도 축구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심지어 정 의원측은 2001년 12월 부산에서 월드컵 조추첨식이 끝난 뒤 서울로 가는 비행기편의 귀빈석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이 위원장의 좌석을 일반석에 배정해 항의를 받기도 했다.

축구협회에 현대계열사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는 점에 대해서도 일각에서는 그의 ‘측근중심’의 리더십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축구협회 남광우(南光祐) 사무총장은 현대중공업 총무부장 출신이며 유영철(劉永喆) 홍보국장은 현대자동차 출신. 가삼현 국제국장은 현대중공업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했고 김동대(金東大) 사무총장보도 현대건설 출신이다.

▼정몽준후보 약력▼

▽1964.2 서울 장충초등학교 졸업

▽1970.2 서울 중앙고 졸업

▽1975.2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77.6 육군중위 만기전역 (ROTC 13기)

▽1980.6 미국 MIT 경영대학원 졸업

▽1982.5 현대중공업 사장

▽1983.3 대한양궁협회장

▽1983.7 울산대 이사장(현)

▽1987.11 현대중공업 회장

▽1988.4 13대 국회의원 당선

▽1990.3 민자당 입당 (92년 1월 탈당)

▽1993.1 대한축구협회장(현)

▽1993.2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현)

▽1993.5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1994.5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현)

▽2000.10 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

▽2001.4 아산재단 이사장(현)

▼직원들 "회사보다 축구-정치에 더 관심"▼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모두 집에 가.” 1984년 울산 현대중공업 작업장. 현장을 순시하던 정몽준 사장은 근무시간에 창고에 숨어 낮잠을 즐기던 직원 몇 사람을 잡아내 일렬로 세워놓고 ‘군기가 빠졌다’고 호통쳤다.

이와 관련해 현대중공업의 한 퇴직자는 “리더십 스타일은 아버지를 빼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원들 일부에서는 부하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스타일을 놓고 “대통령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직원들에게 잘해줬어야지…”라는 불만도 적지 않다.

정몽준 의원의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경영자로서 지낸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75년 곧바로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졸업 후 2년여간의 ROTC 복무기간과 1차 미국 유학기간(78년1월∼80년6월)을 빼면 실제로는 현대중공업 상무로 들어온 80년 7월부터 일한 셈이다.

그는 2년 뒤인 82년 5월 사장으로 승진했지만 회사 경영은 아버지인 ‘왕 회장’(정주영 회장)의 몫이었다. 여기에다 85년 다시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과정을 밟고 87년 11월 귀국해 중공업 회장을 맡은 그는 반년 만인 88년 4월 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처럼 현장에서 경영을 체득할 시간도 짧았지만 경영자 시절에도 그는 회사 일보다는 ‘축구’와 ‘정치’에 관심이 더 많았다. 중공업 출신인 한 현대그룹 임원은 “재벌 2세들이 대부분 그렇듯, 정 의원은 이름만 걸어놓고 회사 경영에는 별 신경을 안 썼다”고 말했다.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도 “집안에 정치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그를 일찌감치 정치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2000년 여름 현대가(家) 형제들간에 ‘왕자의 난’이 터졌을 때 정 의원은 ‘왕 회장’의 오른팔인 현대증권 이익치(李益治) 회장을 몰아내는 데 앞장을 서는 행동력을 보인다.

당시 이익치 회장은 ‘왕 회장’ 소유의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지분을 정몽헌씨에게 넘겨주려는 작전을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정 의원은 가족회의에서 “그룹을 망치는 이익치를 빨리 내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이 회장을 경영에서 손떼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건설의 부실이 그룹 전체로 번지는 고리를 끊은 셈이었다.

또 중공업 내부에서는 정 의원의 재임 기간 중 중공업의 사업구조를 바꿔 탄탄한 체질이 됐다고 평가한다. 권오갑(權五甲) 상무는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으로 조선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불황에 허덕일 때 당시 정 사장은 시추선에 진출하는 등 조선 선종을 다양화하고 로봇 철탑 건설장비까지 업무영역을 넓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영자로서 정몽준은 노조로부터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정 의원에 대한 노조의 불신은 89년 1월 8일 발생한 현대그룹 계열사 노동자 연쇄테러 사건에 그가 개입했다는 의혹 때문. 이에 대해 정 의원은 “그 당시 노조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일부는 명예훼손으로 대법원까지 판결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최영해기자yhchoi65@donga.com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입법부 최고 재력▼

정몽준 의원은 재벌 2세답게 국회의원 가운데 최고의 재력가다. 그러나 막대한 재산 상속 및 축재 과정에 대해서는 의혹이 적지 않다.

정 의원은 91년 부친 정주영 회장이 갖고 있던 현대중공업 주식 중 653만주를 변칙증여를 통해 넘겨받았다는 이유로 국세청으로부터 44억원을 추징당했다.

또 현대 계열사들이 수천억원대의 자금을 들여 현대전자의 주가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린 98, 99년의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 때는 현대중공업 자금이 1882억원이나 동원된 사실이 문제가 됐다. 현대측은 “사장과 부사장이 투자 목적에서 자체 판단으로 주식을 매입했다”고 주장했으나 천문학적인 자금을 오너인 정 의원의 승낙도 없이 집행했다는 설명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92년 대선 때는 현대중공업 현금출납 직원이 “338억원의 비자금이 국민당으로 전달돼 선거자금으로 쓰였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중공업 간부들이 무더기로 처벌받았지만 정 의원은 무사했다. 이를 두고도 그가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정몽준 의원의 주요 재산 내용
구분소유자내용금액
주식 및 채권정몽준현대중공업 주식 약 836만주약 1571억6800만원(18일 종가 기준)
현대정유 주식 31만9340주비상장사여서 추정 불능
현대상선 주식 2만2819주6480만6000원(18일 종가 기준)
현대자동차 채권1억9557만원
부동산종로구 평창동 대지 1177㎡50여억원
성북구 성북동 대지 1177㎡
종로구 평창동 주택(대지 272.7평, 건평 175.5평)
골동품 등이상범 ‘산수화’매입가 5000만원
김용진 ‘선도’매입가 1000만원
유병엽 ‘탐라국의 마을’매입가 2100만원
예금부인 김영명 1억8700여만원
장남 기선(20세) 1270만원
장녀 남이(19세) 1010만원
1720억4513만6000원

(2002.2.28. 국회 재산기록 기준)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대학때 커닝사건▼

“시험을 빨리 끝내고 놀러가겠다는 들뜬 기분에서 저지른 충동적인 일이었다.”

정몽준 의원은 197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의 ‘커닝사건’에 대해 최근 본사 취재진에 이같이 토로했다.

당시 교양과정학부 LB 6반에 속해 있던 정 의원이 커닝을 하다 걸린 과목은 문화사. 앞자리에서 시험을 치르던 같은 과 신선기(辛善基·개인사업)씨의 답안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다가 시험감독이던 전임강사 심재기(沈在箕·현 서울대 국문과 교수)씨에게 걸렸다. 심 교수는 당시 부임 3년째(32세)였고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정 의원이 아예 뒷자리에 앉은 학생의 답안지를 갖다 놓고 베끼는 ‘대담한’ 수법을 사용하다가 중징계를 당했다고 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씨는 “정 의원이 뒤에서 넘겨다보았다”고 증언했다.

심 교수는 정 의원의 시험지를 빼앗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정 의원의 한 동기생은 “친구 몇 명이 심 교수를 찾아가 징계위 회부는 너무하다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고 기억했다.

정 의원은 결국 2학기 모든 과목 수강을 취소당하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때문에 대학을 1년 더 다녀야 했다.

당시 교양과정학부에 재직하던 이익섭(李翊燮·현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학생운동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68년 교양과정학부가 생긴 뒤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한 분위기였다. 커닝이 문제가 돼 교수회의도 많이 열렸고 징계를 받은 학생도 꽤 있었다”고 술회했다.

정 의원은 대학 3학년 때 ROTC(학군단) 후보생이 됐으나 정 의원의 ROTC 1년 후배인 서울대 모 교수는 “당시 징계 경력은 ROTC 되는 것과 상관이 없었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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