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국정조사]회수불능 69조…비리-특혜 밝혀야

  • 입력 2002년 9월 18일 18시 57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불가피했지만 운용과정에서 ‘뒷말’이 끊이지 않았던 공적자금에 대해 국회가 국정조사에 들어간다. 국회는 다음달 3일까지 예비조사를 한 뒤 10월7∼9일 사흘동안 청문회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번 국정조사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될 것으로 예상되는 공적자금 관련 5대 쟁점을 정리한다. 이와 함께 국정조사에 임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략과 국정조사를 앞두고 나오는 ‘걸림돌’도 함께 소개한다.》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부실 금융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쏟아 부은 공적자금은 국회동의를 받지 않은 공공자금을 포함해 총 156조원. 올해 1년 전체 예산 112조원보다 39%나 많은 거액이다. 이 가운데 69조원은 사실상 회수할 수 없는 돈으로 이미 ‘확정’됐다. 국민 1인당 부담은 이자까지 포함해 현재가치 기준으로 143만5000원이다.

당시 상황에서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했다는 점에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거의 없다. 그 부담을 금융기관과 국민이 어느 정도 나눠 맡을 수밖에 없다는 데도 대체로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

그러나 공적자금 투입 및 운용, 회수 과정에서 정부 및 기업의 부실한 감독이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로 국민의 부담이 커졌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이 과정에서 권력실세가 개입해 ‘장난’을 쳤다는 의혹도 적지 않다.

▽자금 투입과정에서의 비리와 유착〓이번 국정조사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 부실 기업들이 망하기 직전 ‘부도작업’에 들어간 뒤 권력층 인사들과 ‘거래’해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까지 나왔던 공적자금을 거래은행을 통해 받아낸 사례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원건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차남 홍업(弘業)씨와 처조카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를 동원해 채권금융회사로부터 4270억원의 부채를 탕감받은 사실이 최근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야당의원들은 부실기업에 충분한 조사없이 수백억원씩 투입된 과정에서 정치권이나 권력의 비호가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고 집중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

▽현대 대우 등 특정 대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대북(對北) 정책을 고리로 현 정부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현대그룹에 대한 공적자금 특혜지원도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

한나라당 이한구(李漢久) 의원은 “정부가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시작된 2000년 5월부터 금융기관과 국책기관 등을 동원해 모두 33조6000억원을 지원했다”며 특혜 지원 의혹을 제기했다. 한보철강 동아건설 등 많은 대형 부실기업이 퇴출됐는 데도 현대만큼은 정부의 지원으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이다.

대우그룹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공식 집계로 29조7000억원. 최근 국회 재경위의 재경부 국정감사에서는 김우중(金宇中) 회장이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공적자금 빼돌리기 등 부실 기업인의 모럴해저드〓지난해말 공적자금 특감 결과 거래 금융기관에 50억원이상 손실을 입힌 부실기업 대주주 16명은 해외여행을 319번이나 했다. 이들은 골프, 카지노를 드나들고 귀금속이나 고급 옷을 사는 데 신용카드로 5억6895만원이나 썼다.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간 대한생명은 그 돈으로 ‘퇴직금 잔치’를 벌이고 태평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은 아예 직원명의로 12억원을 빼냈다.

이런 ‘공짜돈’ 빼먹기 과정에서 은행 직원이 눈감아주었거나 당국의 감시가 소홀했는지도 국정조사에서 밝혀질 대목이다.

▽감독·감사는 제대로 되었나〓국정조사 예비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감사원의 감사결과를 보고 허술한 감사실태에 대해 혀를 내두르고 있다. 이렇게 부실하게 감사를 했는 데도 몇 천 건이 걸렸으니 제대로 했다면 훨씬 더 많이 적발됐을 것이란 지적이다.

한나라당 심재철(沈在哲) 의원은 “감사원 지적 건수의 70%이상이 국회가 이미 제기했던 문제들이거나 언론에 보도된 것이고 비리에 관련된 지적은 한 건도 없었다”면서 “이렇게 부실하게 감사하고도 5281명을 적발했으니 제대로 했으면 몇 배 더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감독원의 부실 감독도 도마에 오를 전망.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간 기업들이 자신들의 부실 자산규모를 부풀리는데 중간 역할을 한 회계법인에 대한 감독이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다. 1998∼2000년 104개 워크아웃 기업 회계법인에 대한 금감원의 감사실적은 29건에 그쳤다.

▽왜 책임지는 정부관료는 없나〓예보가 전직 은행장 등 금융기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1조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기로 하자 금융기관에서는 바로 “그럼 정부에는 책임이 없나”라는 반발이 나왔다. 한 전직 은행장은 “은행이 반대하는 데도 정부가 압력을 넣어 결과적으로 부실해진 대출이 어마어마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사과 한마디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정책 실패’로 공적자금 규모를 키운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나라종금. 정부는 전혀 자생력이 없는 2개 종금사를 다시 영업하도록 허가해 2조3000억원의 공적자금을 더 붓도록 만들었다.

7조7000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간 대한투신과 한국투신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증시부양책을 내놓을 때마다 투신사를 활용했고 투신업계에서는 손해가 날 줄을 알면서도 정부의 종용으로 주식매입에 나선 적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정책 판단에 따른 잘못은 사법적 처리 대상이 아니다”는 이유로 책임을 미루고 있어 이번 국정 조사에서 논란이 될 전망이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양당 국정조사 전략

“권력비리를 찾아라.”(한나라당)

“공적자금 원죄(原罪)를 따진다.”(민주당)

공적자금 국정조사에 임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략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나라당은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번 국정조사에서 현 정권의 권력형비리를 파헤치겠다며 칼날을 갈고 있다.

국정조사 특위위원에 이한구(李漢久) 의원과 임태희(任太熙) 의원 등 ‘경제통’을 대부분 빼고 홍준표(洪準杓), 엄호성(嚴虎聲), 심재철(沈在哲) 의원 같은 ‘공격수’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홍 의원은 “공적자금 정책을 시시콜콜 따질 만한 시간이 없다. 공적자금 투입 및 운용과정에서 권력실세들이 저지른 비리를 밝혀내 청문회에서 터뜨리겠다”면서 ‘사건 위주의 국정조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특히 대통령 차남 김홍업(金弘業)씨와 대통령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개입한 성원건설의 4270억원대 부채탕감 사건을 대표적인 권력개입형 낭비사례로 꼽고 이를 집중 조명하겠다는 전략이다. 또 2조원 가까운 부채가 예보 산하 부실 금융기관에서 탕감된 과정도 샅샅이 파헤친다며 벼르고 있다. 이와 함께 감사원이 지난해 특감에서 “정책당국은 잘못이 없다”며 면죄부를 준 대목도 하나하나 따질 방침이다.

반면 민주당은 “팔 데까지 파 보라”면서 비교적 느긋한 입장이다.

다음달 7∼9일 열리는 TV 청문회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 새로운 의혹을 파헤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 민주당은 공적자금 정책에 대한 정부의 판단 미스를 감쌀 생각은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정부와 비슷한 논리로 공적자금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민주당이 공적자금 투입과 집행 등 의사결정과정에 관여했던 재정경제부 장관 출신 강봉균(康奉均) 의원을 국조 조사지원팀장으로 발탁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강 의원은 “공적자금의 공과를 차분히 따져 우리 경제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특위 간사인 김효석(金孝錫) 의원도 “한나라당이 정치공세로 일관한다면 우리도 공적자금 원죄가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김승련기자srkim@donga.com

▼국정조사 걸림돌

공적자금 국정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될지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감사원과 금융감독위원회 예금보험공사 등 핵심 조사대상 기관이 자료를 잘 내놓으려 하지 않는 데다 청문회의 ‘하이라이트’인 증인 채택 문제는 아직 협상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자료제출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자 “이럴 바에야 아예 국정조사를 보이콧하는 편이 낫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번 국정조사에 대한 부담은 한나라당이 더 크게 느끼는 분위기다. 국정감사 중인데다 추석이 끼어있고 총리서리 인사청문회, 부산 아시아경기대회까

지 겹쳐 국민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시기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밝혀야 할’ 한나라당으로선 적지 않은 고민이다.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 아들 병역비리 의혹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해 섣불리 국정조사 일정에 합의해줬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특히 추석 직후 한나라당과 민주당 특위 간사들은 증인채택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문제는 여야가 사활을 걸고 한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쉽게 합의점을 도출하기 어려운 사안. 지난해 1월 공적자금 국정조사가 마지막에 무산된 것도 증인 채택 방식을 둘러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견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은 공적자금 비리와 연관된 권력 실세들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대통령 장남 김홍일(金弘一) 의원과 차남 홍업(弘業)씨, 대통령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박지원(朴智元) 대통령 비서실장 등 ‘4인방’의 증인 출석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무리한 요구를 고집하는 것은 판을 깨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버티고 있어 양당 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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