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김정일]가까이서 본 말과 행동

  • 입력 2002년 9월 16일 18시 03분


'김정일과의 러시아 동방특급'표지
'김정일과의 러시아 동방특급'표지
《지난해 7, 8월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24일 동안 그의 곁을 지키며 대화와 협상의 창구역할을 했던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러시아 대통령 극동지구 전권대표)가 당시의 기억과 메모를 토대로 200쪽 분량의 책 ‘김정일과의 러시아 동방특급’을 13일 출간했다. 풀리코프스키 대표는 당시 하루에 3∼4시간씩 김 위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등 김 위원장을 가까이서 최장 기간 관찰한 최초의 외국 고위 관리여서 이 책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 위원장은 미리 원고를 보여주겠다는 풀리코프스키 대표의 제의를 사양하고 “보고 느낀 대로 솔직히 쓰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보는 모스크바 고로데츠출판사에서 발간돼 다음 주부터 발매에 들어갈 이 책을 사전 입수해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김 위원장에 대한 인상〓활발한 김 위원장은 항상 대화를 주도했다. 가끔 엉뚱한 주제를 꺼내기도 했는데 “파리의 유명 카바레 ‘리도’의 무희 중 80%가 러시아 여성이며 제일 예쁘다”는 얘기도 했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의사의 권고로 하루에 적포도주 반잔씩을 마셨는데 보르도를 가장 좋아했다. 50세까지는 호주가였으나 최근에는 독한 술은 마시지 않으며 82년부터 금연을 시도해 2년 전 완전히 끊었다고 말했다. 북한군 고위 장성들도 김 위원장을 따라 모두 담배를 끊었다.

▽특별열차 생활〓김 위원장의 특별열차는 전 소련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이 김일성(金日成) 주석에게 선물한 것을 일본에서 개조한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방탄열차는 아니었고 김 위원장의 객차 바닥만 방탄장치를 했다. 미식가인 김 위원장의 전속 요리사는 프랑스 유학파로 무슨 요리든 잘했고 끼니마다 15∼20가지 요리가 나왔다.

환영인파에 답례

▽남북정상회담 회고〓김 위원장은 남북한 언어 격차를 설명하면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말을 80%밖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김 위원장은 ‘남조선어’에는 영어 단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으며 “감옥에서 청와대까지 간 그의 생애를 영화화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감옥에서 자살하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을 생각해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

▽김 위원장의 군사 식견〓김 위원장은 러시아제 T80전차를 보고 “너무 커서 한반도 지형에는 맞지 않다”고 평가하는 등 군사 문제에 식견이 있었다. 그는 군사 퍼레이드 장면을 함께 보면서 “무력은 정기적으로 인민들에게 보여 줘서 인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개혁에 대한 김 위원장의 생각〓김 위원장은 “좁은 땅에서 2500만 인민을 먹여 살리려면 계획경제가 필요하지만 더 잘살기 위해서는 경제개혁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에 전문가를 보내 유럽통합을 연구하고 중국 등에도 전문가를 보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중앙정부 권력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쟁이나 유혈사태 없이 정치 경제를 함께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러시아 공산당이 왜 푸틴 정부를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하면서 배석한 북한 관리에게 “앞으로 그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즉석에서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귀국 길에 오르면서 “푸틴 대통령은 공산당이 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기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철도 연결〓김 위원장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에 큰 관심을 나타내면서 “장기간 철도 여행을 하는 주요 목적 중 하나도 직접 러시아 철도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관리들이 철도 연결을 검토하면서 러시아식 광궤에 반대하고 현재 한반도에 깔려 있는 표준궤를 고집하자 ‘표준궤는 일제가 깐 것인데 왜 집착하느냐’고 야단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외교에 얽힌 비화〓김 위원장은 “외교관은 검은 것도 희다고 하고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늘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외교관으로서는 자격이 없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코뮈니케나 합의서 의정서 등의 명칭보다 ‘선언’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모스크바 선언’에 서명했고 남북정상회담 후에도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가 개방 직후 북한을 외면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 이런 고민을 중국에 털어놓았더니, 중국은 ‘곧 러시아가 다시 돌아올 것이니 기다리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결국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북-러 관계가 회복됐다.

도심관광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김 위원장을 만나자마자 심문하듯 매섭게 몰아붙였으나 김 위원장의 진솔한 대응에 이내 마음이 풀어졌다. 브로치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올브라이트 장관은 처음에는 미국 국기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으나 곧 심장 모양의 브로치로 바꿔 달아 김 위원장에 대한 달라진 마음을 나타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 위원장의 손을 잡는 등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다.

▽김 위원장의 언론관〓김 위원장은 여행 중 대부분의 내외신 보도에 대해 보고받았으나 “언론은 항상 적을 만들기에 바쁘다”며 부정적 시각을 나타냈다. 우리는 “김 위원장이 바이칼호수 물에 손을 씻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기사를 보고 함께 웃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서방 언론은 근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쓴다”며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과 김용순 당비서 해임설을 예로 들었다. 그는 “김용순이 오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휴가 중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전 세계가 나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데 일단 나와 대화해 보면 변할 것이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풀리코프스키는 누구…▼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대통령 극동지구 전권대표(54·사진)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친밀한 관계와 푸틴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상의 비공식 대화 채널을 맡고 있는 인물. 올 8월 김 위원장의 극동 방문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전 일정을 수행했다. 2월 김 위원장의 60회 생일에 초청됐고 2000년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에도 수행하는 등 북한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48년 극동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울리야노프스크 기갑사관학교를 졸업한 기갑장교 출신으로 체첸 주둔군 사령관을 지낸 체첸전의 영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체첸전에 장교로 참전한 아들을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었다. 이 사실을 들은 김 위원장이 처음 만나자마자 위로의 말을 건네 김 위원장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

1998년 30여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2000년 푸틴 대통령에 의해 극동지구 대통령 전권대표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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