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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14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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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08년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말살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를 지었다. 당시 이름은 경성 감옥. 해방될 때까지 4만여명의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참혹한 옥살이를 했고 유관순 열사를 포함한 400여명이 모진 고문 끝에 숨졌다. 우리에게는 애국선열의 넋이 살아 숨쉬는 곳이지만 일본에는 부끄러운 과거사의 현장일 것이다.
부서지는 가을 햇살 속에 붉은 벽돌의 옥사(獄舍)는 고즈넉해 보였고 경내에는 단체 관람객인 듯한 중고교생들의 재잘거림이 그치지 않았지만 일제 잔혹사는 그 흉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인 관람객들이 뒤늦게 조상의 만행을 알고 울음을 터뜨린다는 지하 고문실에 내려가 보았다. 선열들이 고문으로 피가 튀고 살이 찢겼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일경(日警)의 모습을 한 밀랍인형들이 고문을 재현하고 있었다. 물고문 성고문 전기고문… 고문의 종류가 많기도 해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쪽 벽에는 ‘벽관’이라는 고문 체험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몸을 디밀어 보았다. 벽에 얇게 홈을 파서 만든 공간인데 워낙 비좁아 설 수도,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무릎을 구부린 채로 엉거주춤 서 있으려니 신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속박감과 공포가 엄습해 왔다. 이런 상태로 2, 3일을 놔두면 누구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문실을 나오니 중학교 3학년은 돼 보이는 학생들이 역사전시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치∼즈’라고 했는지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들이 한 장의 사진에 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의 현장을 다녀갔다는 자긍심일까, 젊은 날의 추억일까. 역사는 오묘해서 한때의 악의(惡意)를 딛고서 저처럼 해맑은 웃음을 피워낸다.
형무소 돌담을 돌아 나오면서 다시 고이즈미 총리를 생각했다. 그가 이곳에 온다면 무슨 말을 할까.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고 할 것인가. 사죄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법인데 가해자들의 신사(야스쿠니)를 찾아 보란 듯이 참배했던 사람이 어떤 얼굴로 피해자들의 영령을 달래려 들 것인가.
과거에 얽매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개혁 총리’라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한일관계, 넓게는 국제문제까지도 ‘개혁하는’ 심정으로 봐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맹자가 말했던 이대사소(以大事小)의 교훈을 혹 그는 아는지 모르겠다.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이웃 나라와 사귀는 좋은 도리가 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오직 덕이 있는 군주만이 자기 나라가 커도 예를 갖추어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군주는 만물을 다 포섭하여 키우는 천도를 즐겁게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惟仁者爲能以大事小…,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이웃 나라를 섬긴다는 것,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일본과 일본인에게 좋은 것이다.
이재호<정치부장>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