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국정진단 초심과 현실]국민화합

  • 입력 2001년 8월 27일 18시 51분


《“97년 12월 18일의 대통령선거는 국민전체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저는 모든 지역과 계층을 다같이 사랑하며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화해와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선거 승리가 확정된 1997년 12월 19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의 당선 제일성은 ‘국민 화해와 통합’이었다. 이미 그 당시, 각 지역별 계층별 반목과 대립 양상이 다른 무엇보다 국정 운영에 심각한 걸림돌이 돼있었음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3년반 남짓 지난 지금, 과연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어떠한가.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는 물론 많은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體感) 상으로도 심각성은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4일 동아일보가 리서치 앤 리서치(R&R)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역 간 대립과 갈등 해소 및 국민화해와 통합기반 다지기’와 관련한 지난 3년반 동안의 성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63.4%로 긍정적 평가(35.6%)를 압도했다. 또 ‘지역 계층 이념의 갈등과 분열’에 대한 전망과 관련해서도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응답은 46.5%인 반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31.9%에 그쳤다.

이처럼 심각한 현실인식과 결코 낙관적이지 않은 전망의 근인(根因)은 과연 무엇일까. 모든 것을 ‘구시대의 적폐(積弊)’로만 돌려버릴 수 있을 것인가.

▼싣는 순서▼

- ①남북관계
- ②국민화합
- ③相生정치
- ④시장경제
- ⑤사회개혁
- ⑥언론자유

▼대통령의 역할과 리디십

현 국론분열상의 심각성을 정권 교체로 여야 구도가 뒤바뀐 데 따른 과도기적 혼란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오히려 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의 리더십과 행태 쪽에 비중을 두는 진단이 적지 않다. 교과서적 개념도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해줌으로써 사회적 긴장을 풀어주는 중재자가 돼야 한다”(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 크리스토퍼 플레인 교수)고 규정한다.

김대중 정부는 지난 3년반 동안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많은 과제를 국민에게 제시해 왔다. 이는 ‘개혁’을 내세운 정부로서 당연한 일. 그러나 김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기반은 갈수록 약화되는 결과(김 대통령 지지율 변화추이표 참조)를 낳았다. 어떤 부문이든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만은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 국민적 여론 성향을 감안하면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떠오른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논쟁적 이슈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비판론자들을 통합하고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국론분열과 지지도 하락

이 같은 총론적 리더십과 상황 판단의 문제점은 지난 3년반 동안 일어난 여러 정치적 사건과 지지도추이에 여실히 나타난다.

당선 직후 한때 90%대까지 육박했던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98년 4월 2일 국회의원 재보선 과정에서 제기된 지역편중 인사 시비로 인해 다소 영향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높은 수준에서 지지율이 안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랬던 지지율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의 부인 등 고관 부인들이 관련됐던 이른바 ‘옷로비사건’(99년 6월) 이후다.

이 사건이 지지율 하락의 중요 고비가 된 것은 기본적으로 사건 자체의 성격보다는 김 대통령의 대응방식, 즉 ‘비판론자의 포용’의 실패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당시 여론이었다.이 사건은 로비의 실체 여부를 떠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으로 서민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고관 부인들이 몇 백만원짜리 옷 가게에 드나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 특히 김 대통령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서민층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잘못이 없는데 언론이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간다”며 김 전장관 옹호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대통령이 민심을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결과적으로 계층별 화합에 중대한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다.

‘6·15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형 호재도 국민화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역기능을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상회담 직후 잠시 상승기류를 탔던 지지도는 그 후에 야기된 이념적 남남(南南) 갈등, 내정의 혼란, 경제위기론에 휘말리면서 급격히 추락했다. 특히 지난해 중반부터 금년 상반기까지 벌어진 △의약분업 △민주당 의원 3명이 자민련으로 이적하는 ‘의원 꿔주기’ △올 1월 8일 여야영수회담 결렬 △언론사 세무조사 등 갖가지 국론분열 요인들이 중첩되면서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30%선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국민화학의 길은 보이는가

이 과정에서 3년반 전의 초심(初心)은 간 곳이 없고 여야, 지역별, 계층별, 세대별은 물론 언론사, 전문가, 지식인, 노동자 등 온 나라 구석구석이 적과 동지의 양분 구조로 갈라지고 적대감이 만연되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한 김 대통령 등 집권세력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아직 기대치와 거리가 멀다. 날이 갈수록 비판론을 수용하기보다 반박과 공격 위주의 대응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김 대통령의 현실과 동떨어진 낙관론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김 대통령은 “내년 9월이면 경의선이 이어질 것”이라며 “내년 2월까지 4대 개혁을 마무리지어 우리 경제의 탄탄한 발전 터전을 닦을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다.

연세대 허영(許營) 교수는 “국정을 맡았으면 과거의 투쟁 대상까지 통합해야 하는데 현정부는 아직도 자기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 측을 반개혁 수구세력으로 몰고 있다”며 “정부는 모든 사회구조가 양쪽으로 갈라선 이 현실을 극복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힘을 가진 권력자가 먼저 화해와 양보 통합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

▼DJ 리더십의 특징▼

김대중 대통령은 24일 ‘8·15 방북단’ 파문에 따른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 문책론에 대해 “7대 종단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고, 3대헌장 기념탑에 가지 않고 법을 준수한다고 약속해 보낸 것”이라며 “정부로서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임 장관을 옹호했다. 김 대통령은 99년 6월1일, ‘옷 로비사건’과 관련한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 경질론에 대해 “검찰이 만장일치로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을 장관으로 지지했다”며 인책 불가론을 폈다.

이처럼 김 대통령은 매사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며 합리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김 대통령은 99년 6월8일 비등하는 여론에 밀려 결국 김 전 장관을 퇴진시켰지만, 명분상으로는 진형구(秦炯九) 당시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 파문에 대한 지휘책임을 묻는 형식을 취했다. 김 대통령의 이 같은 논리중시형 리더십은 일반 국민의 정서와 괴리를 보이기 쉽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 대통령이 고비마다 보여주는 ‘역사적 소명의식’도 국민통합에 순기능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와 함께 김 대통령이 지닌 ‘도덕적 자신감’도 자칫 비판론자에 대한 비타협적 자세를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집권 중반기, 특히 ‘옷 로비사건’ 이후 김 대통령의 언급에서는 ‘소수파 의식’이 눈에 띈다. 김 대통령은 집권자이면서도 “지난 3년 동안 야당의 협력을 못 받은 것은 물론이고, 심한 괴로움을 당했다”(2001년 1월11일 연두 기자회견)며 ‘힘없는 소수’의 처지를 토로하곤 한다.

그 저변에는 지금 문제의 본질은 다수가 협력해주지 않는 데 있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국정을 책임지는 세력으로서 야당에 대해 포용력보다는 공격적 반응이 앞서는 집권 민주당의 행태는 이 같은 소수파 의식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시민단체 역할 논란▼

DJ 정부가 추진하는 과제 중에는 그 성격상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불가피한 사항들이 적지 않다. 구조조정, 의약분업, 교육개혁, 언론개혁 등 각종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희생과 고통이 수반된다. 대북정책도 따지고 보면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 없이는 그 추진이 어렵다.

문제는 정부가 고통과 부담을 지게 된 대상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충분히 했느냐는 점이다. 오히려 사안에 따라서는 희생을 감내해야 할 대상을 ‘기득권층’이라 몰아붙이는 경우가 없는가 되돌아 보아야한다. 더욱이 이러한 정부정책의 추진 과정에 시민단체들이 가세해 정부를 더욱 ‘호전적’으로 비치게 하고 있다.

2000년 ‘4·13’총선 때의 낙천·낙선운동, 언론 세무조사로 시작된 이른바 언론개혁운동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번 논란을 불러일으킨 ‘8·15 방북단’에도 시민?報?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시민단체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말로는 개혁을 외치면서 본질적 개혁은 외면하고 있다”며 정부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은 이른바 ‘개혁 대상’들의 처지에선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한 옹호론으로 들리기 쉽다. 시민단체들이 투쟁 명분으로 내건 과제 중에는 정부의 필요와 일치하는 것도 많았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민단체들은 고비고비마다 정부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왔고, 급기야 ‘홍위병’ 논란까지 나오게 됐다.

아무튼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와 맥을 함께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정부+시민단체’와 이른바 ‘개혁대상 집단’ 간에 전선이 형성된 게 현실. 또 그런 과정에서 국민 화합보다는 갈등의 상처가 깊어지는 결과가 초래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민화합 관련 대통령 어록▼

일시대통령 언급내용비고
1997년12월19일이 나라에 정치보복이나 지역차별이나 계층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특히 저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대통령당선소감
1998년6월5일지방선거에서 또한번 지역대립이 나타났다. 나는 우리 여당 쪽을 지지하지 않았거나 지지가 약한 쪽에 대해서도 성심껏 협력하고 봉사,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취임100일간담회(6.4지방선거후)
1998년8월15일망국적인 지역대립을 반드시 청산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인사와 지역발전의 공정한 처리가 철저히 이행될 것이다. 나는 모든 지역의 모든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하겠다.8.15경축사
1999년2월24일국민과 협력해서 국민 총단합의 길로 나가는 일을 반드시 해내겠다. 대통령으로서 모든 국민을 똑같이 존중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 전례없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연두기자회견
1999년8월15일지역이기주의를 타파해야한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인재등용이나 예산배정에 있어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았다.8.15경축사
2000년1월26일4.13총선을 통해 지역감정과 지역이기주의를 타파해서 국민적 화합의 시대로 회복해야한다. 국민적 화합없이는 남북관계 발전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실현시키겠다.연두기자회견
2000년8월15일남북 화해협력을 이뤄가고 있는 우리가 내부의 국민대화합을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국민화합을 위해 무엇보다 여야 간의 화합이 이뤄져야 한다.8.15경축사(남북정상회담후)
2000년12월27일국민화합에 대해서는 정부로서는 참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결국 정치권 전체가 협력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선거를 해선 안된다.송년기자간담회
2001년1월11일야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지난 3년동안 야당의 협력을 못 받은 것은 물론, 심한 괴로움을 당했다. 연두기자회견(1월8일 여야영수회담 결렬후)

<윤승모기자>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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