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다시는 못만날줄 알았는데…"

  • 입력 2000년 10월 27일 23시 07분


▼방북후보자 표정▼

서울 관악구 봉천6동의 조종하(趙鍾河·89)씨는 27일 방북 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노환으로 몸져 누운 부인(92)의 손을 꼭 잡았다.

1953년 당시 12세와 8세이던 둘째 셋째 아들을 황해도 연백군 본가로 보낼 무렵만 해도 연백은 ‘남한 땅’이었다. 그는 “정전협상에 따라 연백군이 북한으로 편입돼 헤어지게 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조씨는 “전쟁통에 사진첩도 잃어버려 두 아들의 옛 모습은 기억 속에서만 아른거릴 뿐”이라면서도 벌써 60세 전후가 됐을 아들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죽기 전에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 세끼 밥을 꼬박 챙겨 먹으며 건강에 신경을 써 왔어요.”

평안북도 운산군 위연면에 살던 한상준(韓相俊·84·인천 부평구 부평6동)씨는 6·25전쟁때 인민군 소속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가 한달 후인 7월 말경 강원도에서 국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북한을 포기하고 남측을 택했다”며 “곧 통일이 돼 처자식을 만날 줄 알았는데 50년 세월이 걸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한씨의 가족은 부인과 7남매. 살아 있다면 부인 강위옥씨는 82세, 큰아들 영도는 벌써 62세가 됐겠지만 홀로 남쪽에 남은 ‘죄책감’에 한씨의 마음 한구석은 늘 편치 못했다한씨는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장사 등을 하며 여기저기 떠돌다가 김봉순씨와 결혼했으나 부인마저 2년전 세상을 등져 지금은 무남독녀와 사위, 손자 2명과 함께 살고 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김창훈(金昌燻·74)씨도 17세 나이에 홀로 서울 유학길에 오르면서 헤어진 부모 형제를 이제야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떨리는 몸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83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때는 방송국 돌계단에 앉아 며칠 밤을 새웠지만 허사였고5∼6년전 중국 옌볜을 통해 북의 가족들에게 연락하려다 사기를 당한 뒤로는 다시는 부모형제를 못 만날 것 같다는 ‘절망감’에 시달렸다.

<박정규·이헌진기자>jangkung@donga.com

▼북에서 찾는 남측가족▼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는 큰애가 북한에 살아있다니….”

권경태(權景太·90·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씨는 27일 북에 있는 큰 딸 순호씨(67)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51년 여름, 당시 경기여고 1학년생이던 순호씨는 아버지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49년이 아무 소식 없이 흘렀다.

당시 서울 성북동에서 아무 탈없이 살던 권씨는 유독 큰딸 만을 품에서 앗아간 전쟁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전쟁이 끝난 후 딸을 찾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당시 분위기로는 어디 그럴 수 있었나. 그저 마음 속에 담고 있을 뿐이지.”권씨는 그 후 생이별의 아픔을 누르기 위해 순호씨 얘기는 거의 꺼내지 않고 지내왔다. 30년 전 아내가 일찍 세상을 뜰 때도 순호씨 말은 하지 않았다.

둘째 딸인 순자씨(63·경희대 화학과 교수)는 “서로 반백이 돼서 만나게 됐다”며 눈물을 훔쳤다.

누님의 어쩔 수 없는 월북으로 이산가족이 된 장기환(張基煥·61·서울 성북구 삼선동)씨는 “오늘 우연히 이산가족 상봉신청서를 냈는데 4시간만에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기쁜 표정이었다.

칠순 이상만 우선적으로 상봉할 수 있다기에 기다리다가 사망여부라도 확인해보자는 생각에 이날 오후 1시경 성북구청에 상봉신청서를 냈는데 곧바로 북의 누님 임순(任順·69)씨가 자신을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한 것.

장씨가 누님과 헤어진 것은 50년 9·28수복 당시. 인민군 치하에서 여성관련 단체 위원장을 지낸 것으로 알고 있던 누님은 9·28 서울수복 때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갔다.

장씨는 “죽은 누님이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라며 “남쪽 가족들이 모두 잘 사는 만큼 멋진 선물을 풍성하게 준비해야겠다”고 말했다.

<하종대·이승헌기자>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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