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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6월 17일 0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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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평화공존을 위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한 ‘현실’과 북한 찬양고무 등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하는 ‘규범’ 사이에서 법원과 검찰이 고민하고 있다.
‘실정법’으로 현실사회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위법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판검사들은 급작스레 심화된 괴리현상에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보안사범의 기대심리▼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한층 높아진 국가보안법 위반사범들의 기대심리. 16일 오전 11시 ‘민혁당’사건으로 구속기소된 하영옥(河泳沃·37)피고인의 항소심 선고공판에는 비전향 장기수 6명이 하씨의 가족과 함께 나타났다. 선고 공판이 시작되기 전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비전향 장기수 안영기씨(72)는 “영옥이가 1심에서는 징역 10년이 선고됐지만 이제 현실이 변한 만큼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오세립·吳世立부장판사)가 ‘반국가단체 조직’ 등 1심 판결내용의 대부분을 인정해 하피고인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안씨는 “재판부에 분노한다. 법원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희망과 변화를 느낄 것 아니냐”고 격분했다. 이들의 재판부 ‘성토’는 선고 후 30여분간 계속됐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최근 ‘대통령도 북한 가고 재벌 회장도 북한 가는데 우리가 왜 처벌받아야 하느냐’고 따지는 보안사범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검찰 공안부 조사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곤혹스러운 법원▼
이날 공판에서 재판부의 세 판사는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오부장판사는 하피고인에 대한 선고에 앞서 떨리는 목소리로 ‘현실’을 인정했다.
“남북정상이 만나 평화를 약속하고 곧 후속조치가 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도 개정논의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부장판사는 “실정법을 존중해야 하는 법원으로서는 남북간 합의나 법개정을 미리 예상해 선고할 수는 없다”고 법관으로서의 ‘한계’를 털어놓았다.
대다수 판사들은 “혼란스럽기는 모든 법관이 마찬가지”라면서도 “법원은 ‘법적 안정성’을 존중해야 하므로 법이 고쳐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 현실의 변화를 곧바로 반영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검찰입장▼
이미 기소된 보안사범을 재판하는 법원과 달리 검찰은 앞으로의 공안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공안부의 한 검사는 “마치 예방주사를 맞기도 전에 전염병에 걸린 느낌”이라고 상징적으로 말했다.
대학가의 인공기게양 사건에 대한 검찰의 행보는 검찰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검찰은 13일 이 문제에 대해 “주동자들을 색출해 전원 사법처리하겠다”고 했다가 이틀 뒤인 15일에는 “범의(犯意)를 따져 처벌여부를 결정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검찰의 보안사범 수사와 기소는 국회에서 전개될 보안법 개폐논의와 남북관계의 향배 등에 의해 탄력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