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불안 책임 떠넘기기]당정싸움 혼란만 부채질

  • 입력 2000년 5월 25일 19시 59분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정책위의장이 24일 당정협의회에서 재정경제부 간부들을 향해 일갈한 “당신들은 실패한 관료다”라는 발언이 과천 관가는 물론 경제계 전반에 미묘한 파장을 던지고 있다.

경제관료들은 “‘잘되면 내 덕, 못되면 남의 탓’이라는 말이냐”며 냉소했지만 경제팀 개각설이 이미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금융시장에서는 정부와 여당이 공개적으로 대립한 ‘색다른 상황’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의장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국민은 중차대한 나라 경제의 운명을 ‘실패한 3류 관료’에게 맡긴 셈. 현 상황을 초래한 원인에 대해 명확한 진단이 이뤄지지 않은 채 책임공방을 벌이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은 잘못 없나〓민주당은 ‘제2 위기설’까지 나올 정도로 경제불안 심리가 확산된 이유는 정부가 안일하고 임기응변적이며 사후적인 정책을 남발해 시장의 불신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입장. 김원길(金元吉)의원은 “은행 합병 등 현안에 대해 정부가 오락가락하면서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 경제전문가들은 “정부가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당도 책임 논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현 경제팀에 대한 신뢰가 손상받기 시작한 것은 4월 총선을 전후한 시점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 선거용 선심으로 의심할 만한 정책이 쏟아져 나왔고 야당이 선거쟁점으로 국가부채 문제를 들고 나오자 현안 해결에 전념해야 할 관료들이 반박논리를 제공하는 데 차출됐다.

은행 합병과 투신 부실처리 등 산적한 금융 현안은 선거 이후로 미뤄졌다. 재경부 고위관계자는 당시 “시간이 흐를수록 부실이 커지는 점은 알고 있지만 당의 입장이 워낙 완강해 손을 쓸 여지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은행 통폐합을 공론화할 경우 해당 은행원들의 반발이 걱정됐고 투신 부실은 공적자금 추가 조성론으로 이어져 여당의 득표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고려가 경제논리를 압도한 것.

▽총체적 불협화음의 피해자는 국민〓따라서 정부정책이 중심을 못잡는 것처럼 비치게 된 사태는 경제부처와 여당의 ‘미필적 고의’가 가세한 합작품인 셈. 재경부 관리들이 이의장의 질책에 대해 승복하지 않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한 외국계 증권사 간부는 “집권당과 행정부는 정책 결정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는 운명공동체”라며 “여당이 공개석상에서 원색적인 용어로 행정부를 질책하면 국가신인도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의장의 발언은 재경부, 금감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실 등 경제부처 간의 불협화음에 여당까지 가세한 결과를 가져와 경제운용 주체 사이에 총체적 불신이 만연한 것으로 시장에 해석될 소지를 남겼다. 재경부의 한 국장은 “선거가 끝난 뒤 재경부 금감위 등 부처간 의견조율이 미흡해 시장에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가까스로 하반기 개혁작업의 윤곽을 잡은 터에 느닷없는 발언으로 인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난감해 했다.

정부와 여당의 신뢰가 훼손돼 정책 담당자들이 훗날 책임 추궁을 걱정해 궂은 일에 손대기를 꺼린다면 그 피해는 국민이 볼 수밖에 없다.

<박원재·전승훈기자>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