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AP통신 기자 르포/회담합의 발표후 北표정

  • 입력 2000년 4월 11일 19시 51분


북한은 왜 남북정상회담에 나섰을까.

북-일 국교정상화협상 취재를 위해 방북한 뒤 평양에 남아 있던 AP통신의 사쿠라이 조지 기자는 11일 평양 현지표정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았다. 다음은 요약.

전기가 자주 끊긴다. 건설현장은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쇼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로에 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노동당이 신뢰하는 자만이 살 수 있는 평양에서는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기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 내보이기 위해 만든 ‘전시용 도시’ 평양에서도 심각한 경제난을 느낄 수 있다. 왜 북한이 한국의 정상회담 요구에 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은 정상회담을 통해 남한으로부터 보다 많은 경제적 원조를 얻어낼 수 있다.

10일 남북한은 정상회담에 합의함으로써 반세기가 넘는 분단과 대치를 극복할 돌파구를 찾았다. 지난해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현 상황이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와 비슷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지난 10년간은 북한이 ‘삶과 죽음의 십자로’에 서있었던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평양에서는 드문드문 운행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서 있다. 밤에는 희미한 버스의 실내등에 핏기없는 여성과 군인, 다 해진 잠바를 입은 사람들의 지친 얼굴들이 보인다.

도시 전역에서 행진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지나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데도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여성 교통안전원들이 길거리마다 서 있다.

평양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다. 공공장소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없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군인처럼 질서정연하게 걸어다닌다.

오직 아이들만이 자연스럽다. 밝은 색 옷을 입고 장난을 치며 길거리를 쏘다닌다. 한 여자아이가 기자들을 태운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자 어머니가 황급히 제지했다.

평양에 즐비한 것은 94년 사망한 김일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들이다. 이곳은 가장 깨끗한 곳이기도 하다. 방부처리한 김일성의 시신이 놓여있는 묘역 내부에는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환풍기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다.

<평양AP연합특약>

▼러 타스통신 평양특파원 전화통화/시민들 한결같이 "잘됐다"▼

“며칠 전부터 10일 오전에 남북한 관계에 대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알게 돼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 관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전 9시 40분경 베이징(北京)과 도쿄(東京)로부터 귀띔을 받고도 반신반의하다가 오전 10시 ‘중대 특별방송’을 듣고 놀랐다.”

러시아 타스통신의 평양특파원 알렉산드르 발리예프는 11일 본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긴박했던 10일의 평양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평양에 상주하는 3개 외신인 타스통신, 중국의 인민일보 및 신화통신이 모두 사전에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취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어쨌든 대부분의 평양 시민들은 관영 언론의 보도에 따라 10일 오전 중 정상회담 소식을 알게 됐다. 그러나 평양 시내는 ‘놀라운 뉴스’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고 발리예프는 전했다.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발리예프는 직접 만난 평양 시민들이 한결같이 정상회담에 대해 “잘됐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고 말했다.

평양을 들뜨게 한 것은 오히려 이날 개막된 ‘평양봄예술축전’이었다. 18일까지 계속되는 축전기간에 북한 최고의 명절인 김일성 생일(15일)이 끼어 있고 러시아국립오케스트라와 러시아 군합창단 등 외국 예술단의 공연이 계속돼 평양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발리예프는 북한측이 이날 정상회담 발표를 한 것도 축제 기간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평양에서 4년째 일하고 있는 발리예프는 첫 남북한 정상회담을 직접 지켜보게 돼 행운이라면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평양 시민들의 표정에서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남북한 관계가 ‘혁명적으로’ 변하리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7·4공동성명 정신의 확인으로 양쪽의 신뢰를 회복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클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한편 평양주재 러시아 대사관과 청진주재 총영사관 외교관들은 어렵게 전화가 연결됐으나 “정상회담과 관련해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논평을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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