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會昌대표 ▼
돈에 관한 한 李會昌(이회창)대표는 「절대 내 손으로는 만지지 않는다」는 스타일이다.
경선 당시 이대표진영에서는 「최소한의 경선자금을 마련해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심각하게 대두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대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결국 각자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측근인 黃榮夏(황영하)전총무처장관은 『이대표는 감사원장 재직 때도 재정집행은 항상 아래에 위임하고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회창변호사사무실의 사무장으로 10년째 일하고 있는 李亨杓(이형표)비서관도 『이대표는 변호사수임료 처리도 철저하게 직원들에게 위임하고 직접 챙기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당내에서는 『대통령후보가 움직여야 돈이 만들어진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대표는 「미동」도 않고 있다. 심지어 河舜鳳(하순봉)비서실장은 측근들에게 『돈은 각자 알아서 충당하라. 대선 끝나면 배려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 金大中총재 ▼
국민회의 관계자들은 『金大中(김대중)총재의 수중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는 얼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주머니가 풍성할 때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돈이 없을 때는 왠지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
또 돈이 있으면 측근이나 당직자를 은밀히 불러 용돈을 건네는 경우가 많다. 이때문에 당직자들은 김총재가 개인적으로 호출을 하면 『용돈을 좀 주시려나』라며 은근히 기대감에 부풀기도 한다.
김총재는 정치자금을 포함한 돈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기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음식값도 직접 계산한 적이 있다. 측근들 중에서도 돈 심부름은 측근 중의 측근인 權魯甲(권노갑)의원만이 했다. 그만큼 철저하고 빈틈이 없다. 과거 독재정권이 김총재의 정치자금조달 루트를 파악하려고 계좌를 이잡듯이 뒤졌지만 끝내 혐의를 잡지 못한 것도 김총재의 완벽에 가까운 자금관리 때문이었다.
▼ 金鍾泌총재 ▼
金鍾泌(김종필)총재는 평소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식사를 하거나 물건을 살 때도 계산은 아랫사람에게 맡긴다. 총액을 확인하는 정도이며 내용은 물어보지 않는다.
신용카드는 쓰지 않는다. 바지주머니에 약간의 돈을 가지고 다니는데 현금은 왼쪽 주머니에, 수표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다. 내기를 즐기는 그는 바둑이나 골프에서 졌을 때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즉석에서 꺼내 놓는다.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며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게 김총재의 지론. 80년 신군부에 빼앗긴 재산을 되찾자고 측근들이 건의했을 때도 『그 재산도 누군가가 요긴하게 쓰고 있을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김총재는 가까운 후원그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출처나 규모는 일절 비밀에 부친다.
▼ 趙淳시장 ▼
趙淳(조순)시장은 매우 검소하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그는 역대 서울시장 중 가장 자주 구내식당을 이용한 시장으로 꼽힌다. 이때문에 식당 음식이개선됐다고 말하는이도있다.
공관의 실내온도를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높이거나 쓸데없이 불을 켜 놓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그의 검소함은 어린시절 가난에서 비롯됐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강릉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제2중학에 입학했는데 집안형편이 어려워 평양에서 판사로 재직하고 있던 숙부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고무신 한켤레와 단돈 5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유학간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는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경제기획원장관과 한국은행총재 등을 역임했으나 이재(理財)에는 밝지 못하다는 것이 정설이며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
〈박제균·윤영찬·이철희·정용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