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찌우는 균형과 멈춤, 산티아고 순례길서 깨달았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9일 03시 00분


‘번아웃 증후군’ 치유 김진세 원장, 자신의 경험 책으로 펴내

김진세 원장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벽에 걸린 사진은 그가 찍은 산티아고 순례길 풍경이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김진세 원장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벽에 걸린 사진은 그가 찍은 산티아고 순례길 풍경이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당황스러웠다.

‘환자에게 짜증을 내다니. 힘든 마음을 나누는 것이 큰 행복이었는데….’

2012년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52)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좋아하던 상담실과 서재가 미치도록 답답해졌다.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으로 무기력해지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었다.

‘심리학 초콜릿’ ‘태도의 힘’ ‘행복을 인터뷰하다’ 등을 출간하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전파해온 그였지만 정작 스스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다 언젠가 자신이 적은 10개 항목의 버킷리스트를 발견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 순례’에서 눈이 멈췄다. ‘이거다!’ 싶었다.

최근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이봄)를 펴낸 그를 서울 강남구 상담실에서 만났다. 이 책은 800km에 이르는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경험을 다뤘다. 책에는 세련되게 조언하는 의사가 아니라 방황하고 실수하면서도 문제를 풀려 애쓰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다. 번아웃 되고 2년 뒤인 2014년 길을 떠났는데 그 기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했다.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을 오르며 준비했어요. 설레는 마음에 일상이 버틸 만하더라고요.” 그러다 한 달 일정으로 산티아고 길 순례에 나섰다. 병원은 부원장을 뽑아 맡겼다.

걷기 시작하면 엄청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오늘은 뭘 먹지?’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 침대는 깨끗할까?’ 등 원초적인 생각만 가득했다. 한데 한없이 단순해지자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됐다. “번아웃 된 건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닌 일에 가 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어요. 제일 중요한 건 균형이라는 걸 알게 됐죠.”

몸이 신호를 보내면 멈춰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순례길을 다 걸은 후 땅끝마을인 피니스테레까지 100km를 더 걷겠다는 욕심에 무리하다 무릎이 완전히 망가진 것. 통증을 무시한 결과 순례길 종주마저 힘든 상황이 됐다. “칼날이 다리를 마구 찌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어요. 미련한 놈이라고 얼마나 자책했는지 몰라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등산용 스틱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간신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길 위에서 만난 다국적 순례자들을 보며 느낀 점도 적지 않다. 걸음이 느린 스위스 소녀 루스가 “느린 만큼 더 오래 걷는다”며 꾸준히 가는 모습에서 그릇이 작아도 더 자주 물을 퍼 담으면 독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밴 호주 할아버지 마이크를 보며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졌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그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불안감이 줄었어요. 걱정해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그는 과거에는 일을 하거나 놀러 갈 때도 계획대로 안 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닦달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는다고 했다. “성취가 삶의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지친 분들에게 어디에서든 혼자 걷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어요. 꼭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진세#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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