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F학점 준 스승 뜻 기려… 제자들 1억 추모 장학금

  • 동아일보

세상을 떠난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24년째 장학금을 운영해온 제자들이 있다. 장학회 대표를 맡았던 전웅수 단국대 교수(오른쪽)가 지난해 5월 스승 고정섭 서강대 교수의 산소 앞에서 장학증서를 주고 있다. 전웅수 교수 제공
세상을 떠난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24년째 장학금을 운영해온 제자들이 있다. 장학회 대표를 맡았던 전웅수 단국대 교수(오른쪽)가 지난해 5월 스승 고정섭 서강대 교수의 산소 앞에서 장학증서를 주고 있다. 전웅수 교수 제공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항상 열심히 공부했던 스승의 뜻을 후배들이 잊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마음을 모아 제자들은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을 마련했다. 24년이 흘렀다. 스승처럼 대학교수가 된 제자들은 정년을 앞둔 나이가 됐다. 제자들의 장학금을 받은 후배 20여 명도 교수가 됐다.

그런데 지난해 제자들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우리가 은퇴하면 사적으로 운영해 온 이 장학금이 없어질 수 있겠구나”라는 장학금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국 제자들은 지난달 서강대 경영학과에 ‘고정섭 교수 추모장학금’ 1억 원을 기탁했다. 장학금 운영을 학교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장학회 대표를 맡아온 전웅수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60)는 “선생님은 아주 무서운 분이셨어요.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경영학과 70학번 동기 30명 중 18명은 1학년 1학기에 들은 ‘회계원리’에서 F학점을 받았다. 선생님은 단호했다. “대학교 왔다고 놀지만 말고 공부에 충실해라. 반성하라는 의미다.”

제자들은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선생님이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이미 학교에 5분 일찍 와서 5분 늦게 나가는 교수로 유명했다. 언제나 칠판 4곳에 수업에 필요한 표를 미리 그려놓았다.

선생님은 정이 많았다. 놀러 가면 맛있는 것을 많이 내주었다. 특히 사모님이 해주는 불고기와 만두는 최고였다. 이사를 도와드리겠다, 상담할 게 있다 등을 핑계로 제자들은 선생님댁을 자주 찾았다. 설날에는 일부러 저녁때쯤 찾아갔다.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1985년 선생님이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곧바로 수술을 받았지만, 1987년 암세포는 다른 쪽으로도 전이됐다. 그해 5월 선생님은 세상을 떠났다. 52세 때였다. 서강대 화학과에 다니던 첫째 아들 고승현 씨(47·한국바스프주식회사 상무)는 “첫 수술 때 말기 판정을 받은 터라 오래 못 사실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30대 중반에 접어든 제자들과 선생님, 동창생들 사이에서 추모사업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금세 4000만 원이 모였다. 1988년 추모논문집을 발간했고, 1989년부터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한평생 열심히 공부한 스승의 뜻을 기릴 수 있게 돼 제자들은 뿌듯했다. 회계학 박사과정 학생 1명에게 100만 원을 줬다. 장학증서는 선생님 기일(5월 17일)에 성묘를 가서 수여했다.

전 교수는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을 갖고 시작한 게 아니어서 이렇게 오래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회 수여자인 박성환 한밭대 경상대 교수를 시작으로 장학금을 받은 후배 20여 명은 서강대 강원대 목포대 백석대 부경대 등에서 강단에 서고 있다.

故 고정섭 교수
故 고정섭 교수
학교가 운영하는 ‘고정섭 교수 추모장학금’이 되면서 장학금 대상자와 액수도 늘어났다. 학기당 경영학과 학부생 두 명에게 200만 원씩을 지급하게 됐다. 제자들의 장학금 모금은 계속되고 있다. 전 교수는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계속 ‘정년퇴임해서 월급 끊어지기 전에 얼른 내라’고 말하고 다닌다”며 웃었다. 선생님의 두 아들도 지난달 1000만 원을 기탁했다. 고 씨는 “아버지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선생님들께 감사해 우리도 보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승의 사모님(최진경 씨·73)은 말한다. “매년 나 때문에 성묘와 송년회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다들 바쁜 사람들인데….” 제자들은 답한다. “그 덕분에 저희가 1년에 두 번이라도 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 모이죠. 선생님과 사모님께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서강대#고정섭 교수#장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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