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 ‘행복 지팡이’ 30년만의 귀향길 열다

  • 동아일보

30년 만에 고향을 찾은 이일권 할머니(왼쪽에서 세 번째)가 친지들과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유흥진 씨(오른쪽)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친지들에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삼성SDI 제공
30년 만에 고향을 찾은 이일권 할머니(왼쪽에서 세 번째)가 친지들과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유흥진 씨(오른쪽)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친지들에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삼성SDI 제공
“어머님, 파란색이 잘 어울리는데요.”

“예쁘기는 한데, 너무 비싼 건 아니겠지?”

9일 오후 울산 울주군 언양읍의 한 시장 골목 옷가게 안. 유흥진 씨(48·삼성SDI 울산사업장 근무)는 진열대에 걸린 옷들을 이것저것 들어 보이며 이일권 할머니(87)에게 입어보라고 권했다. 이 할머니는 “아무거나 괜찮다”면서도 오랜만에 입어보는 새 옷이 싫지 않은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파란색 재킷과 검은색 신발, 그리고 친지들에게 줄 선물까지 한 보따리였지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룻밤만 지나면 30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다는 설렘 덕분이었다.

이 할머니의 고향은 경남 합천.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고향을 떠날 일은 절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들이 ‘도시로 나가 사업을 하고 싶다’며 팔을 잡아끌면서 타향살이가 시작됐다. 이후 사업이 망한 아들은 집을 나가버렸다. 연락도 끊겼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6∼7년 전 울산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에 홀로 정착했다.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차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글을 거의 못 읽는 할머니에게는 울산에서 합천까지의 거리(약 162km)는 미국보다 먼 길이었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 씨는 삼성SDI 직원들로 구성된 사회봉사모임 ‘행복 지팡이’에서 3년 전부터 홀몸노인을 찾아 도시락과 밑반찬을 전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 씨는 지난해 말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됐다.

어느 날 유 씨는 할머니에게 “저희랑 고향에 한번 가보시겠어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꼭 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날부터 할머니 고향 방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날이 풀리는 4월을 D―데이로 잡았다. 수소문 끝에 친지들의 연락처도 확보했다. 할머니는 놀이공원 가는 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유 씨에게 “이제 몇 밤이나 자면 될까?”라고 묻고 또 물었다.

10일 오전 9시 할머니는 전날 산 새 옷을 입고 유 씨가 준비한 차를 탔다. 이웃의 박 할머니가 동행했다.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합천. 마침 이날은 먼 친척의 제삿날이었다. 한집에 모여 있던 친지들은 단숨에 달려 나와 “30년 넘게 연락 한 번 없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는데…”라며 흐느꼈다. 그렇게 할머니는 꿈 같은 1박 2일을 보냈다. 다음 날 인사를 나누면서 할머니는 친지들의 손을 쉽게 놓지 못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떠나는 차 안에서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유 씨에게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고향 땅을 한번 밟는 게 마지막 소원이었는데….”

유 씨와 ‘행복 지팡이’ 회원들은 자신이 방문하는 다른 홀몸노인들께도 고향 방문의 기회를 만들어 드릴 생각이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삼성SDI#행복지팡이#고향방문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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