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심은 ‘워싱턴 밥퍼’

  • 입력 2006년 12월 15일 02시 58분


미국 워싱턴 인근 애넌데일에서 한인 자원봉사단체 굿스푼선교회가 운영하는 무료 점심에 남미계 일용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밥, 빵을 받고 있다. 애넌데일=이기홍  특파원
미국 워싱턴 인근 애넌데일에서 한인 자원봉사단체 굿스푼선교회가 운영하는 무료 점심에 남미계 일용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밥, 빵을 받고 있다. 애넌데일=이기홍 특파원
"돈 잘 벌고 좋은 차 몰고 다니는 한국인들을 보면 얄밉고 샘도 많이 났는데,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어요."

13일(현지 시간) 오후 1시경. 미국 워싱턴 인근 애넌데일 시의 한 한국인 교회 뒤편 공터. 70여 명의 중남미 출신 이민자(라티노)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빵이 담긴 쟁반을 들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국의 '밥퍼' 운동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굿스푼선교회(www.goodspoon.org)가 2년 반 전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운영하는 무료 점심 제공 현장.

"오늘도 일거리를 못 찾아서 점심을 굶을 수밖에 없었는데…."

자존심 강한 라티노 노동자들이지만 정성껏 배식해 주는 한인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함에 "그라시에(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배식에는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 부인들도 동참했다.

3년전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왔다는 페루출신의 기기르모 바르가스 씨는 "어느 나라에나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걸 절감한다"고 말했다.

한인타운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한국인 상권이 형성돼 있는 애넌데일의 대형 식품점 앞 거리에는 매일 라티노 노동자들이 늘어선다. 오전 6시경부터 400~500명이 서서 일감을 기다리지만 겨울철에다 건설 불황기여서 공치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점심을 굶은 채 오후 늦게까지 혹시나 하며 기다리곤 한다. 8만여 명에 달하는 이 지역 라티노 가운데 2만여 명이 이런 처지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김재억 목사는 조영길 목사의 도움을 받아 2004년 굿스푼선교회를 설립해 라티노 빈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무료 점심은 물론 작은 아파트 1채를 마련해 갈 곳없는 라티노 이민자들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해 주며 영어도 가르쳐 주고 있다. 많은 한인이 동참해 현재 22개 한인교회와 18개 한인업체, 100여 명의 개인이 기부를 하고 있다. 특히 세이프웨이, 글로발마켓 등 인근 대형식품매장에 근무하는 한인 직원들이 식품류를 무료로 보내주고 있다. 식사준비, 배식 등은 80대의 전직 장성 부부를 비롯해 130여 명의 봉사자들이 도와주고 있다. 선교회는 인근 스털링 지역에 재활용품장 매장을 마련해 한인들이 기부한 옷, 가재도구 등을 팔아 봉사활동에 사용하고 있다.

"2년 전 애난데일의 한 가게에서 온두라스 출신 종업원이 한국인 주인을 살해한 뒤 시신을 불에 태운 엽기적 사건을 뉴스에서 보고 그날로 봉사활동에 동참했다"는 교민 김영조 씨는 "작은 정성이지만 돕다 보니 인종 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뿐만 아니다. 워싱턴 시내에선 최상진 목사가 세운 '평화나눔공동체'란 봉사단체가 흑인 노숙인 등에게 8년째 점심을 제공해 오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등 한인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는 소리 소문 없이 어려운 처지의 소수인종을 돕는 한인단체들이 있다. 일본인 중국인 등 다른 이민자 공동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조영길 목사는 "자존심 때문인지 그동안 이 지역 중남미계 언론매체나 기업 등에선 한인들의 봉사활동에 대해 '좀 더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강한 듯 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이 생색만 내는건 아닌지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

하지만 봉사활동이 계속 이어지면서 라티노들이 한인 사회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한다. 이날 배식이 진행되던 동안에도 차를 몰고 지나가던 미국 시민들이 차를 세우고 어떤 취지의 행사냐고 물어본뒤 "한인들이 뜻깊은 일을 하고 있다. 나도 돕고 싶다"며 연락처를 적어 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영길 목사의 말. "예전엔 라티노들이 한인을 '치노(chino)'라고 부르곤 했어요. 우리 속어로 '떼놈' 비슷하게 경멸하는 호칭이죠. 하지만 요즘은 '좋은 일 한다'는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호칭도 꼬박꼬박 '파스토'(목사)라고 불러 주고요."

선교회 관계자들과 교민들은 한국에서도 최일도 목사가 이끄는 '밥퍼' 운동을 비롯해 어려운 이웃과의 나눔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는 기자의 설명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같은 뜻을 가진 한국의 봉사단체나 기업 등과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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