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황낙주 전 국회의장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8시 27분


12일 타계한 황낙주(黃珞周) 전 국회의장은 30여년에 걸친 파란과 질곡의 정치환경 속에서도 ‘의회 민주주의’의 모범을 실천하려 한 정치인이었다.

1980년 5·17 계엄 선포 사흘 뒤인 20일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려다 계엄군의 총부리에 밀려 쫓겨 나오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던 고인의 모습(신동아 1995년 12월 ‘명사의 사진첩’)은 아직도 많은 동료 정치인들과 국민의 뇌리에 살아 있다. 고인은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다. ‘의회주의의 파수꾼’을 소망했던 고인은 1979년 10·26 직후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아 격동의 시절을 헤쳐 나갔다.

당시 김영삼(金泳三) 총재가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여당인 공화당을 비난하자 여당은 국회에서 ‘YS 제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의회주의 말살기도를 자행했다. 결국 YS는 제명됐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명 총무’라는 고인의 닉네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가 당시 당내의 타협론에 맞서 “오늘을 살기 위해 비굴하게 처신하면 영원히 죽고, 오늘 죽더라도 당당하게 행동하면 영원히 산다”고 했던 말은 군사정권 시절 야당의 정신적 이정표 역할을 했다.

그는 정치 입문 전부터 ‘강골’이었다. 27세 때 고향인 진해에 서여중과 여상고를 설립하고 16년간 교장 겸 교사를 역임하면서 자유당 이승만 정부의 독재를 거침없이 고발했다. 1971년 8대 국회 때 정계에 입문한 이후에도 줄곧 부정비리 고발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YS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도 그는 ‘여당 내의 야당’ 역을 자임했다. 하지만 93년 예산안 날치기 파동 때 국회부의장으로 ‘총대’를 멘 일은 고인이 두고두고 후회를 할 만큼 그의 정치역정 중 ‘가장 짙은 그늘’이 됐다.

김창혁기자 c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