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 총리서리 지상청문회]배포 크지만 독선적 CEO型 리더

  • 입력 2002년 7월 18일 18시 45분


장상 총리서리
장상 총리서리
《7·11 개각에서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서리로 지명된 장상(張裳)씨는 지명 직후부터 장남의 한국 국적 포기 문제 등과 관련해 광범위한 여론의 검증을 받고 있다. 그에 대한 본격 검증은 29, 30일 이틀간 열리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장 총리서리의 국정업무 수행능력과 자질을 지면을 통해 검증해 본다.》

▼교육관▼

장 총리서리의 교육관은 ‘자율성 확대’와 ‘경쟁력 강화’로 요약된다. 그가 99년 3월 전국 사립대총장협의회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민주당이 발의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도 이에 바탕한다.

지금도 국회에 계류 중인 민주당 측 개정안은 △재단이사회의의 교원임면권을 학교장에게 넘겨주고 △비리로 물러난 사학재단 관련자의 복귀연한을 5년으로 연장하며 △교수회 직원회 학생회 등 학내 자치기구를 공식기구화하는 것 등이 골자였다.

이에 대한 장 총리서리의 반대논리는 ‘사학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자칫하면 사학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 총리서리는 당시 전국 149개 사립대학교의 이해를 대변해 국회 교육위원들을 상대로 법 개정안의 부당함을 호소한 것은 물론 지난해에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와도 만나 법안 통과를 막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장 총리서리는 또 “대학이 한국에서 편안한 학교로 자라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세계 무대로 나가 세계와 경쟁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으로는 부족하다. 보편적 비교가 가능한 자연과학으로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장 총리서리는 기여입학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만 그의 교육경력이 사립대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던 탓에, 공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견해를 밝힌 경우가 거의 없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리더십▼

장 총리서리와 한두번 얘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여장부’라는 평가를 내리는 데주저하지 않는다. 이화여대 총장 시절 그는 교육자라기보다는 경영마인드를 가진 최고경영자(CEO)로서 더 수완을 발휘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96년 간선제로 이대 총장에 선출된 이후 6년 동안 장 총리서리가 국내 유수의 대기업으로부터 끌어들인 기부금 액수는 모두 843억원. SK LG 포스코 신세계 등이 학교 건물 신축을 위해 50억∼150억원씩을 쾌척했다.

또 제3세계 여성을 국내로 초청해 교육시키는 ‘국제여성양성기금’ ‘북한여성을 위한 교육기금’ 등의 특별기금도 장 총장 재임시절에 생긴 것들이다.

기부금을 받아내는 방식도 다른 대학 총장들과 달랐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돈이 필요하니 도와달라”는 식이 아니라 “이화여대가 이런 비전을 갖고 있으니 ‘이화의 꿈’을 사라”는 식이었다는 것.

간혹 “꿈값이 얼마냐”고 물으면 “그건 사는 사람이 결정하라”고 답해 질문한 사람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수완 탓에 장 총장 재임 중에 6개였던 이대의 대학원 수는 13개로 늘어났고, 400명이 넘는 교수를 새로 뽑아 교수진을 완전히 물갈이하기도 했다.

장 총장은 97년 말 외환위기 때에는 고통분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교직원들의 호봉 승급까지 정지시키는 혹독한 임금 동결조치를 시행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의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탓에 학생회와 일부 교수들 사이에서는 독선적이라는 비판도 듣는다.

99년 3월 이후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직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직을 맡아 대학총장들과의 각종 회의를 주관할 때에도 그는 좌중을 주도하는 장악력을 보였다는 게 당시 참석자들의 얘기이다. 그러나 교육과 행정은 다르다는 점에서 장 총리서리의 국정수행능력을 예단하기는 어렵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통일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북한전문가가 아니므로 실수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장 총리서리는 스스로 회고한 것처럼 북한전문가가 아니지만, 현 정권 출범 직후인 98년5월 통일고문회의 고문에 위촉된 이후 민주평통자문회의 부의장(98년 9월∼2001년 8월)과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고문(99년 1월∼현재)을 맡는 등 줄곧 연을 맺어왔다. 통일고문회의에 참여했던 정부의 한 관계자는 “장 총리서리는 회의에서 긍정적인 인식을 밝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장 총리서리는 평양방문 직후 월간지 신동아 기고를 통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사람 됨됨이였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매우 솔직하고 활달했다.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느낌도 받았다”고 방북 인상을 전하기도 했다.

다만 장 총리서리는 남북교류 특히 여성교류에는 상당한 관심을 보여왔다.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장 총리서리는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함께 여원구(呂鴛九)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 북한 여성계 대표들을 만나 남북 여성단체 교류협력과 군위안부를 주제로 의견을 나눈 적도 있다.

또 2000년 12월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이 열리기 직전 남북이 공동으로 기소장을 제출하자고 제안한 뒤 실제 이 제안서를 북한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여성관▼

“한국 사법계를 민주화시키는 길은 여성 법조인을 많이 길러내는 것이다. 한국경제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도 여성 중소기업인이 많이 나와야 한다.”

장 총리서리는 이화여대 총장 시절 여성전문인력 양성을 유독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법대와 경영대를 중점 지원하고, 고시생 기숙사인 ‘솟을집’을 확대하기도 했다.

정치권에 여성이 많이 진출해야 한다는 것도 장 총리서리의 지론. 그는 6·13 지방선거에 대비해 여성단체협의회가 주도해 구성한 ‘2002여성정치지도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50년대 말에 여성 의원이 전체의 3%였는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3.8%밖에 안 된다”고 개탄하곤 한다.

장 총리서리가 60년대 말 “여자가 무슨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예일대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88년 목사 안수를 받은 것도 그의 여성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는 군의 여성지원자에 대한 가산점 문제에 대해서도 “시험은 미국처럼 남녀가 똑같이 봐야 한다. 합격이 된 뒤 약간 배려하면 모를까 시험 볼 때부터 가산점을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일축해 왔다.

장 총리서리가 그렇다고 여성운동가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는 주로 교육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극단적 페미니즘’은 경계해 왔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경제관▼

장상씨는 총리서리로 지명된 뒤 국무조정실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스스로 ‘시장경제 신봉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는 또 “경제는 물 흘러가듯 해야지 정부가 불필요하게 외적으로 개입하면 시장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경제 발달사 과정을 보면 시장경제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가장 적합한 경제체제였다”고 말했다.

장 총리서리가 이화여대 총장 재임 시절 보여준 경영스타일에 대해서는 “실용주의 노선에 가까운 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총장 시절 아주대에 있던 서윤석(徐允錫) 교수를 이대 경영대학장으로 스카우트하면서 연봉을 3배 이상이나 주는 파격적 대우를 한 것은 전 대학사회에 ‘인사파괴’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화여대 김일섭(金一燮·경영학) 교수는 “(장상 총장은) 전체를 다 잘 하려고 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필요가 많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적인 대학경영을 했다”고 말했다.

장 총리서리는 관행을 중시하기보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파격을 피하지 않는 도전적 경영스타일을 보여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단편적인 사례로 그의 경제관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실제 재계나 경제관료, 경제학자들은 “반(反)시장 성향인지 시장 친화적인지를 알 수 없다”며 여전히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좌승희(左承喜)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경제계 사람들과 별로 접촉이 없었다”고 말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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