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훈련 넉달째 천은숙]『정말 농구가 하고 싶어요』

  • 입력 1998년 2월 1일 20시 12분


대한이 지난 지 한참. 그러나 여전히 춥다. 오전 8시. 우유 한잔으로 아침을 때운 뒤 운동복이 든 가방을 메고 찬 바람속으로 나선다. 서초동 셋방에서 코오롱 스포렉스까지는 10분거리. 자꾸 어깨가 움츠러든다. 운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다시 이를 사려 문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왔는데…. 지금 그만두면 웃음거리밖에 안돼.” 트레이닝복에 땀이 흠뻑 밸 정도로 체육관을 달린 뒤 다시 바벨을 잡는다. 아킬레스건 수술로 약해진 오른쪽 발목 근육에 이제 힘이 많이 붙었다. 오후에도 러닝과 슈팅. 코오롱팀에 몸담았던 시절 얼굴을 익혔던 체육관 직원들이 눈감아주고 있지만 눈치훈련이 미안하기는 마찬가지.밤에는 SBC농구동호회나 연예인 농구팀이 게임을 한다. 한 자리를 얻어 함께 뛰다보면 혼자 운동할 때처럼 외롭지 않아서 좋다. 천은숙(29).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여자농구를 이끌며 90년 베이징과 94년 히로시마아시아경기 우승의 주역. 그런 그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지난해 팀으로부터 이적동의서를 받아들 때만 해도 그에겐 희망이 있었다. “이제, 새 둥지를 찾아야지. 그래서 선수생활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해야지.” 오라는 팀도 있었다. 프로농구가 출범하면 연봉도 많이 받고, 그러면 부산의 어머니에게 작으나마 거처도 마련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IMF한파로 산산이 부서졌다. 프로출범은 자꾸 미뤄지고, 오라던 팀에서도 소식이 없었다. “하긴 자고나면 팀이 없어지는 마당인데요, 뭐. 선수도 줄여야할 마당에 뽑기가 쉽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혼자 훈련을 시작한지 벌써 넉달째. 셋방을 얻느라 빌린 돈도 이제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입은 체육연금으로 받는 매달 20만원뿐. 한달 방세도 안되는 돈이다. 요즘 그는 더욱 외로움을 탄다. 10년동안 몸담았던 코오롱팀이 지난해 말 해체되고 후배들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농구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농구를 떠나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아요.” IMF한파앞에 천은숙은 너무도 가냘퍼 보인다. 〈최화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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