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집」김복동할머니의 베푸는 삶…기념관건립에 성금

  • 입력 1997년 12월 14일 19시 57분


『이제 뭐 바랄 게 있겠어요. 그저 나같은 사람들 잊혀지지 않는 것밖에…』 경기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 「나눔의 집」에 사는 김복동(金福童·71)씨가 통장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1천여만원을 위안부기념관 건립에 써 달라고 쾌척해 세밑의 한파를 녹이고 있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씨는 14세 때인 1939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등으로 옮겨다니다 22세 때 고향땅을 다시 밟았다. 6.25때 홀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으로 피란 가 부두 막노동부터 식당일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다. 온갖 고생 끝에 60세 때 다대포해수욕장 근처에 5평 남짓한 구멍가게를 얻은 뒤로는 제법 장사가 잘돼 그럭저럭 불편하지 않게 살 수 있었다. 김씨는 홀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가난한 이웃을 내가족처럼 보살펴 「양산할머니」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어 몇년 동안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제대로 치료 한번 받은 적이 없었다. 김씨가 「나눔의 집」으로 들어온 것은 지난해 10월. 『혼자 외로워하지 말고 서로 의지하며 살자』는 다른 할머니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이제 고달팠던 한평생을 정리할 때가 됐다 싶었다. 그러던 김씨가 얼마전 「나눔의 집」 원장 혜진(慧眞)스님에게 불쑥 통장을 내밀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평생 안입고 안먹으면서 모은 돈이에요』 통장에는 정부에서 나오는 「위안부 생활보조금」과 동사무소에서 매달 10여만원씩 주는 「생활보호대상자 지원금」 등을 고스란히 모아놓은 1천여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혜진원장이 「나눔의 집」앞에 짓고 있는 위안부기념관 개관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불황 탓에 모금액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하1층 지상2층 건물 2개동으로 이루어진 기념관 건물은 독지가의 도움으로 이달 말 완공될 예정. 그러나 전시장을 차리기 위해서는 3억여원이 더 필요하나 지금까지 모금한 돈은 2천5백만원에 불과해 내년 3.1절에 맞추기로 했던 기념관 개관은 연기가 불가피해졌다. 이런 어려움을 눈치챈 김씨는 기념관 건립기금으로 써달라며 전재산을 쾌척한 것. 『나한테는 필요없는 돈이에요. 이제 쓸 데도 없는 걸요』 『차마 못받겠다』던 혜진원장도 김씨의 고집스런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신치영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