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아서 했는데”… 아이에게 의젓함 강요했다면[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 동아일보

〈241〉 ‘허구의 독립성’ 가진 부모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어린 시절을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게 보내야 했던 부모들이 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챙기고, 자기중심적인 엄마의 비위를 맞추고, 어린 동생들을 마치 부모처럼 보살핀 경우 등이다. 이들은 정작 어른이 되고 나서 어른스럽게 관계를 이어가고 아이를 키우는 것을 힘들어 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꼭 채워져야 하는 ‘의존욕구’라는 것이 있다. 독립적이냐 의존적이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중요한 사람에게 조건 없이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경험, 사랑이 필요할 때는 사랑을,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를, 보호가 필요할 때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기본적이고 생존적인 욕구가 바로 의존욕구다. 본능적으로 채워졌어야만 했던 이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어른스러워야 했던 아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 결핍이 생기며 ‘허구의 독립성(pseudo-independence)’을 갖게 된다. 실은 의존적이지만 겉으로는 독립적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린 시절에 허구의 독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이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삶의 모든 것이 내가 해내야 하는 책임인 것만 같다. 고통이 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보면 매 순간 그렇지는 않다. 슬플 때도 있지만 기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만 편안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이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가끔 사람조차 귀찮다. 목적 없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외출하는 것도 귀찮다.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사랑스러운 내 아이도 귀찮고 성가시다. 당연히 육아가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허구의 독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자신의 아이에게 어른스럽게 행동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했는데, 아이는 왜 빠릿빠릿하고 야무지게 해내지 못하는 걸까 싶기 때문이다. 왜 의젓하지 못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아에 지치고 힘들 때, 형제 중 첫째에게 또는 순한 아이에게 은근히 의젓하기를 강요한다. 어린 시절 손 안 가는 아이, 모범적인 아이, 착한 아이, 부모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아이 중에 이런 허구의 독립성을 가지고 자란 사람이 많다. 혹여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면 늘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라도 나이가 어리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성장하는 데는 세월이 필요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자율성을 요구하거나 아직 어린아이인데 완전히 믿고 맡겨 버리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너무 빨리 자율성을 강요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부작용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도움을 바라는 것이 독립적이지 못하고 무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해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부모가 나에게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라는 수치심이 들어 도와달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한다. 나의 결정과 방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과 도움받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아이를 키울 때는 늘 “너를 믿어” 뒤에 이 말을 붙여줘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어려움을 겪어. 너처럼 경험이 많지 않은 나이에는 더욱 그렇지. 그럴 땐 엄마 아빠한테 편하게 얘기해 줘.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린 시절 아이로 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자식의 자리로 내려오는 경험을 한 번은 했으면 한다. 부모가 들어주든 아니든, 부모에게 그때 힘들었다고 말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부모가 되려는 행동도 이제는 그만했으면 한다. 허구의 독립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마음 깊은 곳에 부모가 언젠가 나를 인정해 주겠지 하는 마음에, 미움이 크면서도 부모로부터 건강하게 독립하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맴돌며 과도하게 챙기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채우지 못한 의존욕구는 배우자가 채워줄 수 있다. 배우자는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이다. 진지하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정서적 보호와 위로를 받으면 많은 부분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아이다운 것이 가장 좋다. 말 안 듣고 철없고 떼도 부리고 조르기도 하고 까불기도 하고. 아이는 아이답게 자랄 때가 가장 건강하다. 아이가 잘 못하면 “괜찮아, 아직 어리니까 천천히 배워 나가면 돼”라고 말해줬으면 한다. 이 말이 잘 나오지 않으면 외워서라도 해줬으면 한다.

#어린 시절#허구의 독립성#의존욕구#육아 스트레스#부모 역할#자율성 강요#도움 요청#정서적 보호#가족 관계#아이 성장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