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한 거지, 실패한 게 아냐[이재국의 우당탕탕]〈88〉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4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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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오락실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친구 따라 처음 가 본 오락실. 처음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친구 옆자리에 앉아 친구가 하는 ‘보글보글’ 게임만 구경했다. 친구는 너도 해보라면서 선심 쓰듯 50원을 건넸다. 게임은 금방 끝나버렸지만, 그 짧은 경험은 강렬했다. 밥 먹을 때도 오락실 생각밖에 안 났고 자려고 누웠을 때도 천장이 보글보글 화면으로 보였다. 오락실에 들르느라 학원에 지각하는 날이 많아졌고, 엄마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 원짜리 한 개를 몰래 꺼내 오다가 나중에는 500원짜리를 꺼내 올 정도로 대담해졌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엄마 지갑에 손을 대는 날이 많아질수록 내 보글보글 실력은 늘어만 갔고, 드디어 왕을 깨기 위한 마지막 단계까지 왔다. 그렇게 학원도 빼먹은 채 눈에 불을 켜고 왕을 깨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구야? 고개를 돌렸는데 엄마였다. 나는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엄마는 내게 500원을 주시며 “몇 판만 더 하고 와”라는 말씀을 남기고 오락실을 나가셨다. 알고 보니 오락실 주인 아주머니와 우리 엄마는 잘 아는 사이였고, 아주머니께서 우리 엄마에게 말씀하신 것 같았다. 난 겁먹은 얼굴로 집에 갔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까지 엄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저녁을 다 먹고 설거지하고 계신 엄마 옆에 가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하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엄마는 “너무 빠져서 하지는 마” 한마디만 하셨다. 나는 그날 이후 급격하게 오락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스무 살이 넘어 친하게 지내던 형에게 사기당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로 큰돈이었다. 자기가 짓고 있는 건물에 투자하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나는 엄마를 며칠간 조르고 졸랐다. “이 돈만 주시면 저는 제가 평생 알아서 살아갈게요. 부탁드려요, 엄마.” 엄마는 막내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큰돈을 마련해 주셨다. 사기라는 게 늘 그렇듯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석 달 후, 그 형은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경찰에 사기로 그 형을 고소했고 2년 후 그 형은 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잡혀서 한국으로 이송됐다. 나는 그 형을 증오했고 그 형의 부모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 무릎 꿇고 빌었지만 합의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엄마는 내게 말씀하셨다. “용서해라. 개구멍을 보고 개를 몰아야지 개구멍이 없는데 계속 몰아붙이면 개가 사람을 무는 법이야.” 난 분해서 눈물이 났다. 아무 답을 하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데 엄마는 또 말씀하셨다. “그 사람 용서해야 나중에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지. 네가 다른 생각 안 한 것만 해도 엄마는 고맙게 생각해.” 나는 다음 날 그 형을 찾아가 합의를 해줬다. 그리고 그날 이후 누군가 큰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노력 없이 뭔가를 이루게 해준다고 하는 얘기에는 흥미를 잃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살면서 실수했을 때 옆에서 “넌 실수한 거지. 실패한 게 아니야”라고 얘기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 시절 오락에 빠져 엄마 지갑에 손댄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벼운 실수라 할 수 있지만 스무 살 넘어 큰돈 사기당한 건 나에겐 정말 큰 실수였다. 만약 그 일 때문에 내가 “난 실패한 놈이야”라고 생각하고 그 늪에 빠져버렸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 같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실수#실패#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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