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에 빠지다[이준식의 한시 한수]〈233〉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12일 2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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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산 시월의 아침, 서리 맞은 나뭇잎 일시에 바뀌었다.
타는 듯해도 불이 난 건 아니요, 꽃 핀 듯하지만 봄이 도래한 건 아니라네.
가지런히 이어져 짙붉은 장막을 펼친 듯, 마구 흩날려 붉은 수건을 자른 듯.
단풍 구경하려고 가마 멈추고, 바람 앞에 선 이는 우리 둘뿐이려니.
(寒山十月旦, 霜葉一時新. 似燒非因火, 如花不待春. 連行排絳帳, 亂落剪紅巾. 解駐籃輿看, 風前唯兩人.)

―‘두목의 단풍 시에 화답하다’(화두녹사제홍협·和杜綠事題紅葉) 백거이(白居易·772∼846)



당시 가운데 단풍 노래의 수작을 꼽으라면 단연 두목(杜牧)의 ‘산행’. ‘저 멀리 차가운 산 비탈진 돌길 오르자니,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네./저물녘 단풍 숲이 좋아 수레를 멈추나니,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의 꽃보다 붉어라.’ 단풍 삼매경에 흠뻑 빠져든 시인은 이월 봄꽃보다 더 아름답도록 붉은 단풍에 매료되어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노라 고백한다. 백거이가 만난 가을 산의 단풍은 좀 더 유난스럽다. 불타는 듯, 봄꽃이 활짝 핀 듯, 붉은 비단 장막을 펼쳐 놓은 듯, 붉은 수건을 갈기갈기 자른 듯, 혹은 눈앞에 가지런히 펼쳐지기도 하고 혹은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기도 한다. 화사한 단풍에 취해 저도 모르게 황홀경에 빠져든 두 시인, 하나가 간결미를 살렸다면 다른 하나는 화려한 맛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래도 단풍에 매료되어 ‘가던 길 멈추었다’는 공감대가 있으니 ‘같은 곡조를 서로 다르게 연주했다’라 할까.

화답시(和答詩)는 대개 친분이 두텁거나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이끼리 주고받는다. 백거이가 두목보다 서른 남짓 연장인 데다 사회적 신분 또한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에 둘이 직접 시를 주고받은 건 아니다. 단풍 숲의 매력에 도취된 백거이가 불현듯 두목의 시를 떠올리며 모티프를 얻지 않았나 싶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백거이#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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