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펀지와 수세미[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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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스펜서 수세르의 ‘히셔’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초등학생 티제이는 두 달 전에 엄마를 잃었다. 엄마, 아빠와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어떤 차가 들이받았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헤매느라 아빠는 아들이 얼마나 힘든지 살피지 못한다. 엄마 대신 살림을 해주는 할머니만이 티제이의 유일한 언덕이지만 건강이 안 좋으시다. 폐인처럼 지내는 아빠한테 감정이 쌓이던 티제이는 아빠가 엄마의 차를 폐차장으로 보내자 불만이 극에 달한다. 사고로 고물이 되었어도 그 차는 엄마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 차가 사라지면 엄마도 영원히 사라진다. 티제이는 아빠 돈을 훔쳐서 차를 찾으러 가지만, 차는 폐차장 압축기에 눌려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히셔. 상스러운 말만 내뱉고 폭력적인 정체불명의 사나이. 티제이는 우연히 낯선 히셔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집 안에 그를 들인다. 무단 침입한 셈이지만 무서워서 내쫓지 못한다. 자기 집처럼 눌러앉은 히셔.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목욕도 하며, 한 식구처럼 밥을 먹지만 아빠는 개의치 않는다. 아내의 죽음 이후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할머니는 오히려 말 상대가 생겨 반갑다. 종일 소파에 누워만 있는 아빠, 학교에서 매일 얼굴에 상처를 달고 오는 아들. 정작 이 둘은 대화를 안 한다. 히셔가 끼어든다. 사사건건 약을 올리며 티제이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다. 엄마를 잃은 슬픔도 한가득인데 히셔 때문에 열받는 날들의 연속이다. 엄마의 죽음 이후 말문을 닫아버린 티제이가 히셔한테 화를 내며 감정을 쏟아낸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하소연을 하다 보면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포장할 때가 많다. 듣다 보면 앞뒤가 안 맞아 재차 캐묻거나 지적을 하게 되는데 나도 그렇다. 친구는 내가 무조건 편들어주기를 바라지만 나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진실을 가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자주 삐딱선을 탄다. 친구는 결국 화살을 내게 돌려 한바탕 화를 퍼붓고는 개운해진 얼굴로 집에 간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니? 진짜 힘들었겠다” 식의 위로를 해주는 건 무척 쉽다. 상대의 얘기를 귓등으로만 들어도 폼 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는 하소연을 하고 싶을 때면 또 나를 찾는다.

다정한 위로보다는 따끔한 핀잔이 때로는 약이 된다. 부드러운 스펀지가 못 닦은 때는 거친 수세미가 해결해준다. 아빠에 대한 불만을 마음 깊은 곳에 담아만 두던 티제이가 히셔로 인해 아빠에게도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히셔는 떠나면서 티제이에게 선물을 남긴다. 납작하게 고철 덩어리가 된 엄마 차. 티제이는 엄마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집착했던 것의 실체를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떠나보내지 못하고 매달렸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년은 아픈 만큼 성큼 자랐다.

이정향 영화감독
#스펜서 수세르#히셔#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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