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 웅덩이’ ‘논 퍼내 세운 벽’… 땅을 작품화한 임옥상[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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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140여 일 동안의 전시, 물경 55만여 명 관람. 바로 임옥상의 개인전 ‘여기, 일어서는 땅’ 이야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했던 임옥상 개인전은 많은 화제를 만발케 했다. 언론 보도 77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 7000여 건. 반응은 뜨거웠다. 전시 기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즐겨 해설했다. 아예 김규리 배우는 도슨트를 자처하면서 임옥상 예술 바로 알리기에 앞장섰다. 장사익 가수는 꽃다발 대신 전시장에서 즉석 노래를 불러주었다. 임옥상 전시의 커다란 특징은 관객 수보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가 대거 동참했다는 점이다. 작가의 평소 오지랖을 짐작하게 한다. 하기야 개막식에서 축사한 주요 인사들만 해도 여타의 개막식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도올 김용옥 철학가, 유홍준 교수, 승효상 건축가, 그리고 참석자는 고은 시인,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등 참 다양했다.

임옥상의 ‘대지―어머니’(1993년)와 ‘검은 웅덩이’(2022년). 인물의 거친 살갗과 튀어나온 힘줄은 세파에 시달린 
인생을 짐작하게 하고, 먹물을 담은 지름 4m의 웅덩이는 파란 풀밭과 상징적인 대조를 이룬다. 임옥상은 거친 땅과 흙, 물을 작품
 소재로 삼아 현대사를 은유해 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임옥상의 ‘대지―어머니’(1993년)와 ‘검은 웅덩이’(2022년). 인물의 거친 살갗과 튀어나온 힘줄은 세파에 시달린 인생을 짐작하게 하고, 먹물을 담은 지름 4m의 웅덩이는 파란 풀밭과 상징적인 대조를 이룬다. 임옥상은 거친 땅과 흙, 물을 작품 소재로 삼아 현대사를 은유해 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개막식을 한 잔디 마당은 이색 풍경을 자아냈다. 상반신 나체의 할머니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다. 거친 살갗과 툭툭 튀어나온 힘줄, 세파에 시달린 인생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믿음직스러운 자세는 온갖 풍상을 이겨낸 듯, 아니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내라는 듯, 당당하다. 마치 대지 모신 같은 느낌을 준다. 3m가 넘는 철 주물작업 ‘대지―어머니’(1993년)는 포토존으로도 각광받았다. 이 철조 작품 바로 앞에 ‘검은 웅덩이’(2022년) 설치작업이 있다. 지름 4m의 둥그런 웅덩이는 먹물을 담고 있다. 파란 풀밭 한가운데의 검은 웅덩이, 상징성이 크다. 붉은 색깔보다 더 품이 넓고 강하다. 대지의 어머니는 검은 물을 보고 있다. 그것은 썩은 물일까. 모든 색깔을 섞은 풍상의 물일까. 작가는 이미 1980년대에 웅덩이 그림을 그린 바 있다. 드넓은 벌판의 웅덩이는 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 이 땅을 물들인 수난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웅덩이 그림은 하늘로부터 몰려오고 있는 먹구름을 그렸다. 불길하다. 1980년대의 핏빛 웅덩이는 작가의 노년에 이르러 먹물 웅덩이로 바뀌었다. ‘대지―어머니’는 미술관 개관 당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만큼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린다는 뜻이리라.

임옥상의 ‘여기, 일어서는 땅’(2022년). 높이 12m의 대작으로 전시장 한 면을 가득 채웠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임옥상의 ‘여기, 일어서는 땅’(2022년). 높이 12m의 대작으로 전시장 한 면을 가득 채웠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의 간판은 ‘여기, 일어서는 땅’(2022년)이다. 높이 12m의 대작은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 채우게 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경기 파주 장단 평야의 논에서 작업한 야심작이다. 논바닥을 캔버스로 삼아 거칠게 삽으로 그림을 그리고 종이로 떠낸 것이다. 논바닥을 직접 떠내서 그런지 표면은 거칠고, 게다가 추수 후에 남은 벼 나락 등 여러 가지의 잔재들이 붙어 있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땅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작품의 상단에는 거대한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아래엔 다섯 명의 인물이 정면을 향하여 서 있다. 인물 주위엔 한반도 지도를 비롯한 갖가지 도상이 있고, 특히 평화 통일이라고 쓴 글씨도 보인다. 흙이 주는 촉감.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흙이나 땅은 원초성을 의미하면서 인간 삶의 토대를 이루게 한다. 마침 쇠와 고도의 기술을 활용한 건너편 전시장의 최우람 개인전과 대비되어 흥미로웠다. 흙과 쇠. 이는 인류 역사를 상징한다.

작가는 말한다. “땅은 부동산으로 취급되어 교환가치로만 여겨 왔다. 하지만 온갖 재앙의 시기에 땅은 누워 있기보다 반기를 들고 스스로 일어났다. 땅의 역할을 거부하고 극약 처방처럼 일어선 것이다. 나는 이미 동학 백주년 기념 전시(1994년)에 땅을 일으켜 세운 작품을 출품한 바 있다. 동학은 땅과 더불어 사는 농민이 일어선 것이다. 동학은 땅이 일어선 것이다. 이번에는 휴전선 땅을 일으켜 세워 역사와 사회를 다시 보게 하려 했다.” 평생 누워만 있던 논을 작가는 일으켜 세워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래서 일어서는 땅이다.

전시장의 인기 포토존은 ‘흙의 소리’(2022년)였다. 약 4m 크기의 거대한 얼굴, 옆으로 눕혀져 있고, 머릿속을 빈 공간으로 처리해 관객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이번 전시는 흙 작업의 근작과 1980년대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초기작 ‘땅 2’(1981년)는 평화로운 산야를 참혹하게 파헤친 모습을 묘사했다. 상반부는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자연을 표현했고, 하반부는 파헤쳐진 붉은 땅으로 비교되는 분할 구성을 보였다. 땅을 파헤친 인간의 욕망. 땅의 수난사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흙과 땅을 소재로 한 작가의 집념은 평생 재료학을 연구하게 했고, 신작은 흙을 캔버스 바탕에 깔면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임옥상은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대작 ‘아프리카 현대사’(1988년)는 거대 담론으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이번 전시는 신구 작품의 비교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이끌었다.

전시 기간 중 많은 미담이 쏟아졌다. 세계적인 미술 출판사 대표가 전시를 관람하고 감동하여 작품 구입 및 출판을 제안했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물론 전시 준비의 과로는 작가를 오랫동안 입원하게도 했다. 많고도 많은 화제 만발. 임옥상의 ‘일어서는 땅’은 현대미술의 풍요로움을 제공했다. 누워 있는 땅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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