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발렌카는 결승전에 앞서 이런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그냥 운동선수일 뿐이에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하겠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가 왜 정치와 연관돼야 하는 거죠.”
또 다른 메이저 대회인 지난해 7월 영국 윔블던 대회에 그는 출전하지 못했다. 주최 측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러시아와 동맹국 벨라루스 선수의 출전을 금지했다. “우리가 윔블던 출전을 금지당한 이후 바뀐 게 있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상황이 슬픈 거예요.”
동갑내기인 사발렌카와 샤르파르는 세계무대에 서기 위해 각자의 훈련장에서 땀흘려 온 정상급 선수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 사람을 출전이 금지된 선수로, 다른 한 사람을 출전이 불가능한 선수로 갈라놓았다.
내년 7월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스포츠계는 두 개로 갈라져 있다. 당장 이번 봄부터 올림픽 예선이 치러지는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가 “대회를 보이콧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한국과 미국 등 34개국이 우크라이나 편에 섰다.
눈에 띄는 것은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해 온 유엔인권이사회(UNHCR)가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옹호하고 나선 점이다. “운동선수가 어느 나라 여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차별받아선 안 된다. 전쟁으로 인권이 노골적으로 무시될 때 인종·성별·국적에 따른 차별을 배격한다는 더 큰 의미의 인권 규범이 존중돼야 한다.”
선수의 재능과 땀에 대한 보상이 출신 국가에 따라 달라져선 안 된다는 논리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선수들 역시 그들의 여권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판단이 쉽지 않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우크라이나의 올렉산드르 우식은 “러시아 선수들이 따낸 메달은 피, 죽음, 눈물의 메달이 될 것”이라고 했다.
IOC는 이런 반발을 고려해 중립국 선수 자격으로만 출전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긴 했다. 하지만 형식적 제약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발렌카 선수는 호주오픈 우승 직후 “(고국) 사람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국기 표시가 없어도) 모두가 내가 벨라루스 선수라는 것을 안다. 그럼 된 거다”라고 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올림픽에서 봐왔듯 ‘ROC(러시아 올림픽위원회)’ 표식을 달고 나오는 선수들이 러시아 선수임을 누구나 알아볼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 선수들이 세계 최대 스포츠 무대에서 선보이는 활약상을 이용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정치 선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을 치른 직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령했고, 지난해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 폐회식 4일 뒤 보란 듯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의 대외 정책에서 올림픽 정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독일 나치가 1936년 전 세계의 반대 여론에도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며 국력을 정비해 3년 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과 다르지 않다.
파리 올림픽에 출전할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선수이기 이전에 전쟁 생존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가해국 선수들과 마주해야 하는 아픔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물론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잘못 때문에 그 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4년간 기다려온 기회를 빼앗기는 것은 여전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선수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증발시킨다는 점에서도 전쟁의 야만성은 드러난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