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성공한 빌드업의 역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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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정성화 분·앞줄 오른쪽)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의거 이후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장면. CJ ENM 제공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정성화 분·앞줄 오른쪽)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의거 이후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장면. CJ ENM 제공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영화 ‘영웅’은 동명 창작 뮤지컬이 원작이다. 원작은 2009년 초연해 9번째 시즌 공연에 들어간 뮤지컬로 작품성과 수익성은 이미 검증됐다. 영화 크랭크인 때부터 뮤지컬 플롯과 음악 등 흥행 요인을 스크린으로 옮겨 올 수 있느냐가 관심사였다. 그 점만 놓고 보면 영화는 성공이다.

영화는 공연을 스크린으로 가져오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였다. 14년간 뮤지컬에서 안중근 역을 맡은 배우 정성화가 영화 주연을 맡았고, 음악 역시 대부분 현장 라이브 녹음이다. 공연적 요소를 스크린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기어이 관객을 울린다. 의도가 모두 맞아떨어진 ‘빌드업(build up)’ 축구 같다. 그럼에도 영화가 미진하다는 평도 적잖다. 원작의 플롯과 음악을 충실히 담아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공연의 감동을 그대로 옮기기 위한 원작 중심의 플롯 전개가 영화로 와선 다소 느슨하게 느껴진다. 영화 ‘영웅’은 서사적 개연성과 캐릭터성을 쌓아가는 대신 배우 연기를 부각하는 연출을 택한다. 공연에서 성공한 이 전략은 영화에선 원작 플롯의 서사적 빈틈을 더 크게 드러낸다.

원작 공연에선 서사 대신 배우들의 연기를 부각하는 방식에 고개가 쉽게 끄덕여진다. 공연은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영화에 비해 연기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다. 직접성과 일회성이라는 특성이 현장의 긴장감과 연기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여준다. 그리고 연기를 통해 극대화된 감정이 극 개연성의 일부를 이룬다.

이는 공연 예술의 큰 강점이다. 연기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 무대를 압도하며, 서사가 채워지지 않더라도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의도까지 넘겨보게끔 한다. 이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열어젖힌다. 원작 공연이 각광을 받은 것도 개인이면서 민족주의자이자 천주교인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면모에 대해, 충분치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민족주의라는 단일 프레임을 넘어서 조명하는 자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공연의 서사적 빈틈이 보기에 따라선 장점이 되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상대적으로 공연보다 시간적·공간적 제약에서 자유롭고 더 많은 장면을 보여주기에, 서사 전개에 대한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다. 보다 충분하게 서사적 갈등과 개연성이 쌓여야 관객의 마음이 움직인다. 영화 ‘영웅’은 원작 공연과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진 않고, 공연을 재현하는 쪽을 택한다. 캐릭터의 내면과 감정,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 공연처럼 노래와 연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노래에서 극에 필요한 서사를 추출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남겨둔다.

이를 통해 공연을 스크린 속에서 재현하지만 아쉬움도 동시에 남긴다. 스토리라인은 캐릭터나 플롯을 쌓아 나가기보다는 원작 뮤지컬 속 유명 원작 넘버를 부르기 위해 구성한 듯한 인상도 준다. 플롯은 그야말로 꽉 짜인 빌드업 축구처럼,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 위한 전진 패스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나 유머 코드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지만 플롯을 강하게 의식하는 탓에 마치 배우들이 숙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의 구성을 옮겨 온다는 전략이 통하고 있지만, 서사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스크린에선 캐릭터의 내면이 다소 흐릿하다.

뮤지컬이자 역사물이어서 이와 같은 한계가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다루면서 영화 전반부는 민족 감정의 관점에서, 후반부에선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조명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내면은 배우의 표정과 노래를 통해서만 비추고, 장면은 행적만을 숨 가쁘게 뒤따르다 보니 엄혹한 시대에 보편적 평화 사상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상적 여정은 적어도 작품 속에선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천주교와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시대의 대안적 가능성을 찾아보려던 사상가로서 안중근 의사의 면모를 비출 듯 말 듯하다가 끝난다. 원작도 이러한 부분에서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영화의 아쉬움이 더 짙어진다.

물론 이를 상업영화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긴 하다.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담론보다는 기존 담론의 소비와 팬덤만이 반복되는 시대에 말이다. 아름다운 패스와 슛만을 생각하자.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영웅#뮤지컬 원작#공연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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