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칸막이 친 대통령실, 청와대와 뭐가 다른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2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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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소통 한다며 대통령실 옮기더니
기자회견 않고 관저정치·지지층만 만나
청와대 나와 ‘제왕적 대통령’ 될 참인가

지난 주말, 120년 만에 열린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회를 보았다. 1902년 임인년은 고종 황제 등극 40년과 망륙(望六·51세)의 겹경사 해였다. 그해 음력 11월 사흘간 경운궁에서 거행됐던 임인진연(壬寅進宴)을 국립국악원이 ‘임인진연의궤’ 기록대로 재현해 눈이 호강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시점으로 보면 좀 민망하다.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해 위엄을 떨쳤다고는 하나 3년 뒤 그러니까 1905년이면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뺏길 위기 상황이었다. 드라마처럼 고종이 환생해 잔칫상을 받았다면 “40년 다스림에 억조의 백성이 즐거우니” 같은 치사와 “장하신 태평성대 무엇으로 보답하리” 같은 가무악 가사가 죄스럽지 않았을지 온몸이 오글거렸다.

당시 유라시아에서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이 벌인 그레이트 게임은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으로 바뀌어 전개되고 있다. 그때도, 지금도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그러나 고종은 개혁은커녕 전제군주가 통치제도의 상위에 있다며 군주권만 틀어쥐었고, 지배층은 권력 다툼에 골몰하고 있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사람 볼 줄 모르고 아첨 좋아하는 군주와 양반들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이 슬프게 이어진다.

1900년 기록 중에는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한국을 나누어 갖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문사 사장 남궁억이 이러한 사실을 (황성)신문에 실어 알렸다. (의정부 참정) 조병식이 민심을 놀라게 한 것이라 하여 구속시킬 것을 상주하였다”는 대목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층이 비판적 언론을 싫어하는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국권을 빼앗겼던 대한제국과 지금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비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 “수시로 언론과 소통하겠다”며 용산 집무실 이전을 강행했던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래 놓고 15일 국정과제 점검회의나 20일 청년 200명과의 간담회처럼 ‘엄선된 국민’하고만 소통하며 흡족해했다는 뒷말엔 임인진연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권력의 속성일까.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않기 위해 “청와대 참모는 대통령과 장관의 소통을 보좌하도록 내각 중심으로 운영하겠다”고 했고, 문재인 정권의 ‘청와대 정부’가 “부처 위에 군림하며 권력만 독점한다”며 수석·보좌관회의가 국무회의보다 주목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던 윤 대통령의 발언이 엄연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윤 정부의 수석비서관회의 기사와 국무회의 기사를 동아일보 검색 시스템으로 찾아보면 수석비서관회의 기사가 좀 더 많다. ‘대통령실’과 ‘윤석열’을 키워드로 넣으면 5배는 더 많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포인트 인하로는 사실상 법인세 인하에 따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는 동아일보 17일자 기사를 보면 ‘대통령실’이 부처 위는 아닐지 몰라도 여당 위에 군림하는 건 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제2부속실을 없애고 대통령 부인은 내조에만 전념토록 하겠다고 약속한 기록은 1년도 지나지 않았다. 김건희 여사는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비자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20일 간담회에선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환경은 인류가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발언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히는 모습이다.

당무에 개입하지 않는다던 윤 대통령이 “당원 투표 비율 100%” 당 대표 경선 룰에 관여하고, 윤핵관 먼저 관저에 초청하는 ‘관저 정치’를 하는 것은 전제적 군주를 연상케 한다. 그리하여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할 수 있다면 유감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지층만이 모인 임인진연 같은 행사에나 참석해 “장하신 태평성대 무엇으로 보답하리” 같은 소리만 듣는다면, 윤 대통령은 현실을 제대로 보고 국운을 개척하기 어렵다. 정녕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면 차라리 윤 대통령이 퀵서비스 배달 현장이라도 찾아가 생생한 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던 윤 대통령이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지만 ‘날리면 파문’ 이후 1층 프레스센터 앞에 칸막이를 친 용산, 참모들로 인의 장막을 친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은 벌써 군주적 대통령으로 변한 듯하다. 대통령이 진정 민심을 알고 싶다면, 매일 악플까지 챙기며 국민과 만나는 기자들과 까칠한 신년회견을 갖는 게 백번 낫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대통령실#국민소통#제왕적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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