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이브’와 ‘양’이 우리와 함께[안드레스 솔라노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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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애프터 양’을 본 지 두 달이 넘도록 아직 그 영화가 나의 인생 영화인가 아닌가를 고민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면서 일본의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예명으로 활동하는 코고나다가 이야기 속에서 그려내는 세계 때문일까? 다양한 인종이 가족을 이루어 점심 식사로 일본 라면을 먹고 완벽한 디자인의 옷을 입으며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꾸며진 집에서 사는 목가적인 미래의 세계. 아니, 오히려 이 세계 속에서 영화는 불안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쉽사리 잊히지 않는 것 같다.

백인 남편과 흑인 아내로 구성된 부부와 함께 사는 양(Yang)은 이들이 입양한 아시아계의 어린 딸을 위해서 장만한 안드로이드다. 어느 날, 작동을 멈춘 양. 가족은 백방으로 고쳐보려 애를 쓰지만, 소용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은 그저 기계가 고장이 나 작동을 멈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한 명이 죽은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아직도 이 영화가 나에게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아마 며칠 전에 읽었던 뉴스 때문일 것이다. 관세청이 사람의 신체를 본떠 만든 성인용품 ‘리얼돌’의 수입을 일부 허용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생산되는 인형들은 단순한 마네킹이 아니다. 인간과 같은 체온을 가지고 있거나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기도 한다. 지금은 성적 욕구를 위해 판매되고 있지만 다양한 필요로 기능이 개발돼 인간과 교류할 날이 머지않았다. 기술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는 한국 사회 속에서 곧 우리는 로봇과 한집에서 살아가며 일상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영화 ‘애프터 양’과 며칠 전에 읽었던 뉴스 때문에 이브가 생각났다. 벌써 10여 년 전 일이다. 콜롬비아의 한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방문해 로봇 엔지니어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때 그는 꿈에서 거미로 변신하는 개를 보았다며, 그 꿈 덕분에 당시 개발하던 로봇의 관절 부분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했다. 서울 외곽에 있는 연구소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그때 그는 소만큼 큰 네발 로봇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 로봇은 군용으로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구역을 달릴 수 있고 깎아지른 바위와 덩굴을 기어오르며, 가파른 계곡을 뛰어 내려갈 수도 있고 협곡을 건널 수도 있었다.

이 외에 그가 개발하고 있던 로봇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브다. 이브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재현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였다. 당시 구현에 성공한 기술은, 이브가 지겨운 표정을 짓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브를 처음 보았을 때, 입술에 칠한 립스틱이(혹은 물감이) 치아에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이브가 있던 연구실은 마치 고급 승용차를 수리할 법한 차고나, 세련된 고급 장난감을 고치는 전문 병원 같은 분위기를 띤 곳이었다. 이브는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커튼을 젖혀 그 너머의 정원을 구경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코는 오뚝하고 눈동자는 검게 빛이 났으며 눈썹은 완벽한 아치형에 입술은 작고 도톰했다. 이브의 얼굴은 실제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했다. 엔지니어는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주기를 꺼렸다. 다만 모델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본뜨는 대가로 큰 보상을 받았다는 것만 확신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남자든 여자든 로봇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도 흔해지겠지. 그리고 이 로봇들이 작동을 멈추면, 우리는, 영화에서 그랬듯이, 가족을 잃은 듯한 슬픔에 빠지겠지.

‘애프터 양’과 뉴스를 보고 내가 떠올린 건 이브뿐만이 아니다. 아주 옛날부터 생각했던 질문들도 같이 기억이 났다. 이제야 조금씩 그 답이 보이는 그런 질문들이다. 만약, 로봇이 고장 나서 멈추는 게, 마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면 말이다. 연인인 로봇을 때리는 것은 범죄가 될까. 한 아내가 인간 남편과 안드로이드 남편, 이렇게 두 남편을 두는 것도 허용될까. 로봇이 인간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안드로이드 범죄만을 분류하는 법률도 생기겠지. 주인 없이 자유로운 안드로이드가 공생하게 될까. 아니면 우리 인간은 그저 영원한 노예로 삼을 로봇들만 찍어내게 될까.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로봇#이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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