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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입력 2022-08-18 03:00업데이트 2022-08-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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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새로운 대북 정책인 ‘담대한 구상’을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6개 항목으로 구성된 ‘담대한 구상’을 대북정책으로 제안했다. 사실 담대함을 따지자면 과거 보수 정부들이 훨씬 더 담대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은 북한의 평균 소득이 3000달러에 이를 때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 항목도 6개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의 연결, 남-북-러 가스관 부설, 송전망 구축 사업 등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까지 참여시키려 했다. 인프라도 송배선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력·교통·통신을 다 포괄했다.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개성공단 국제화, 지하자원 공동개발, 국제금융기구 가입 주선 및 국제투자 유치 지원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대북 제안이 담대한지 소극적인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북한이 거부하면 의미가 없다. 과거 보수 정권 시절 남북관계가 작명과는 오히려 반대로 흘러갔던 것도 제안에 담긴 당근이 작았기 때문은 아니다.

윤 정부의 제안은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지금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소형화와 수소탄 개발까지 선언한 상태다. 북한이 생각하는 핵무기 가격이 훌쩍 뛰었다는 뜻이다. 훨씬 더 북한에 호의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에도 상욕을 퍼붓던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전제로 한 윤 정부의 ‘당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한국 정부가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전제로 내거는 한 아무리 파격적 지원을 해준다 해도 북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핵 협상에 있어서 철저히 미국하고만 상대하고 있다. 비핵화와 대북정책을 연계시키는 정책은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세 번씩이나 김정은과 마주 앉아 회담을 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관계를 깨달았다면 비핵화와 대북 지원을 연계한 전임 정권들의 접근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윤석열 정부는 그 어느 정권보다 당당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과거 정부의 유산이 없다.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물론 매년 식량 약 40만 t, 비료 10만 t을 지원하던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았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쌀 10만 t, 옥수수 10만 t, 비료 30만 t, 아스팔트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고 옥수수 1만 t을 주겠다고 하자 북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불과 4개월 뒤 천안함을 공격했고 이어 거리낌 없이 연평도까지 포격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을 폐쇄시켰다. 이제 남북 간에는 계승할 것이 없다. 원래 줬다 빼앗기가 제일 어려운 법이다. 이제 북한이 문재인 정부도 못 해준 것을 윤 정부에 해내라고 할 일도 없다.

둘째,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북한은 지금까지 셀프 봉쇄를 단행하고 있다. 남북이 서로 마주 앉지 못하는 것은 북한 때문이지 한국 때문은 아니다.

셋째, 한국은 훨씬 부유해졌고, 북한은 훨씬 가난해졌다. 가장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에 이어 코로나 봉쇄까지 겹쳐 북한의 금고와 창고는 이미 텅텅 비었다. 국방력에 있어 한국은 국토가 포격 받아도 소극적 대응밖에 못 했던 과거와 다르다. 반면 북한은 연료와 식량 부족으로 몇 년째 연례 군사훈련도 못 하고 있다.

이젠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왜 항상 우리가 욕설을 퍼붓는 북한에 먼저 다가가야 하는가.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겠다면 적극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만 밝히면 된다. 코로나 봉쇄를 풀고 경제교류를 할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 만나 북한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된다. 먼저 뭘 해주겠다고 말빚을 질 필요도 없고, 북한이 필요한 것을 제시하면 하는 것 봐서 파격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해도 충분하다.

끝으로 북한의 도발엔 남북관계 단절을 각오하고 과거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반격으로 대응한다는 의지와 대비 태세를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단절되면 괴로운 것은 북한일 뿐이다. 시간도 북한 편이 아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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