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오피니언

피 묻은 정의의 여신[임용한의 전쟁사]〈216〉

임용한 역사학자
입력 2022-06-14 03:00업데이트 2022-06-14 04:26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프랑스군의 참호에 영국군이 발포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병들은 참호 라인을 따라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포격이 놀랄 정도로 정확해서 한 발이 터질 때마다 희생자가 나왔다. 영국군이 포격을 중지하고 전진을 시작하기까지 5명의 장교와 80여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장면은 현대 전쟁의 한 장면이 아니다. 1704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에 독일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전투 장면이다. 이날 영국군 지휘관은 처칠의 조상인 말버러 공 존 처칠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포는 청동제 대포로 현대의 대포에 비하면 성능과 위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포의 결정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희생이 컸던 진짜 이유는 병사들이 고개도 숙이지 못한 채 꼿꼿하게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휘관들은 적이 돌격해 올 때 재빠르고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차렷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개를 들고 전장을 응시하고 있어야 한다. 겁쟁이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는 자신감을 잃어버릴 것이고, 적이 진격을 시작했을 때 고개를 들고 그 방향으로 총을 겨누기보다는 공포와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당시의 귀족 장교들이라고 해서 병사들의 생명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이런 ‘허세의 논리’를 너무 쉽게 믿었고, 실험과 시도로 대항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똑같은 주문을 외운다. “우리는 더 큰 재난(패전)을 피하기 위해서 그 희생을 감수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격렬한 분노와 비난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그런 분들일수록 단순한 명제와 도그마에 집착하는 성향이 더 강하더라는 것이다. 전부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렇다. 당신의 도그마는 검증해 보았냐고 하면 이미 검증된 것이라고 말하거나, 검증에 실패하면 정의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부당한 조치와 가혹행위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다.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임용한 역사학자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