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주화 되는 죽음들[삶의 재발견/김범석]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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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대가족이 주를 이루던 시절 노인들은 윤달에 수의를 미리 준비해서 영정사진과 함께 장롱 한구석에 보관했다(이 수의가 요즘으로 치면 연명의료계획서이다). 약이라고 할 것도 변변치 않고 병원도 마땅치 않았던 그 시절에 집안에 노인이 앓아누우면 온 가족이 함께 간병하고 돌봤다. 노인들은 자신이 평생 살던 집에서 임종을 맞았고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남은 가족들은 고인이 머물던 방에서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렇게 집과 삶 속에 죽음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와 함께 아파트가 들어서며 상황은 달라졌다. 4인 가구가 국민 표준이 되면서 대가족은 해체됐고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는 집에서의 임종을 불편해했다. 때마침 병원은 많아졌으며 병원 내 장례식장은 성황을 맞이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집이 아니라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병원 안에 가둠으로써 우리 일상으로부터 죽음을 단절시켜 버렸다. 죽음이란 나는 모르는 일이 되었고 나아가 남의 일이 되었다. 죽음이 삶에서 분리되고 외주화된 것이다.

죽음의 외주화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집에서 키우던 가축을 잡아먹던 시절에는 적어도 그 가축에게 미안하고 고마워했다. 하지만 도축장이 들어서며 동물의 죽음이 외주화되자 고기는 그저 마트에서 사는 상품이 되어버렸고 결국 공장식 축산이 표준화되었다. 우리는 더는 소나 닭, 돼지를 생명이 아닌 물건 취급하며 얼마나 싸고 맛있느냐로 평가한다. 죽음이 생활에서 분리되어 외주화되자 죽음은 새로운 비즈니스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죽음을 맞는 장소의 변화는 단순히 공간의 이동에 그치지 않는다. 환자가 집을 떠나 병원에 옮겨지는 순간 환자는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처럼 병원 시스템에 끌려간다. 병원에서는 사망 과정에 들어선 죽음도 무조건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입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면 콧줄로 영양을 밀어 넣고 숨을 못 쉬면 억지로 산소를 공급한다. 수십 개의 줄을 연결해 내일 죽을 사람을 본인 뜻과는 무관하게 몇 달이고 연명시키는 일도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탈인간화는 덤이고 돌봄도 덩달아 외주화된다. 죽음의 외주화는 다시 죽음에 대한 준비의 부재로 이어진다. 말기 암 환자들조차도 막상 임종을 맞으면 영정사진을 못 구하는 일이 허다하다.

대부분은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단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죽음의 외주화가 정상처럼 되어버린 사회에서 마지막 과정은 힘들고 지난하다. 나와 내 가족은 이 과정을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할지, 한 번쯤 미리 생각해 보는 것도 지금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듯하다.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도시화#죽음#외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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