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독일의 줄타기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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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내건 어정쩡 행보에 “푸틴과 동침” 뭇매
신냉전 격화에 ‘금메달 외교’도 시험대 올랐다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헤이스팅스 이즈메이 초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나토의 설립 목적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나토는 러시아를 내쫓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독일을 제압하기 위해(to keep Russians out, Americans in, and Germans down) 고안됐다.” 그 말대로 나토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시작된 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 소련의 팽창과 전범국가 독일의 부상을 막기 위한 집단동맹이었다.

요즘 나토 동진(東進) 반대를 내걸고 전쟁불사를 외치는 러시아도 소련 시절 나토 가입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1955년 서독의 재무장과 나토 가입이 추진되자 정치공세 차원에서 나토 가입을 요청한 것이다. 이즈메이는 “도둑이 경찰관 되겠다는 격”이라며 거부했고, 소련은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모아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출범시켰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엔 통일독일의 나토 잔류, 즉 동독의 나토 편입이 미소 간 난제였다. 당시 서방 측이 거듭 “나토 관할권을 동쪽으로 1인치도 넓히지 않겠다”고 구두약속을 하고서야 독일 분단은 끝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제 나토는 1000km 넘어 러시아의 코앞까지 확대됐다.

나토 역사에서 독일은 ‘주역’이 아닌 ‘문제’였다. 그러면서도 나토의 보호 아래 경제성장을 이뤘고 그런 독일을 향해선 주변의 견제도, 새로운 역할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독일은 신중했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자랑하는 영국이나, 미국이라면 거리부터 두는 프랑스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여전히 전범국의 책임과 동맹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독일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또다시 괴로운 시험대에 들었다.

많은 나라가 각종 무기와 전함, 전투기까지 보내는 상황에서 독일이 내민 것은 헬멧 5000개였다. 당장 “다음엔 뭘 보낼 건가. 베개?”라는 조롱이 나왔다. 독일은 에스토니아가 보유한 옛 동독산 곡사포의 우크라이나 이전 승인 요청도 ‘분쟁지역에 살상무기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워 거절했다. 독일 국민 대다수는 정부의 방침을 지지하지만, 외부에선 ‘또 습관적 평화주의 핑계냐’고 비아냥거린다.

독일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석유와 천연가스의 러시아 의존이다. 특히 이미 완공돼 가동을 기다리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비겁하게 러시아 눈치를 본다고 뭇매를 맞고 있다. 주간지 슈피겔은 “독일이 위기 때마다 그랬듯 옆으로 비켜 앉아 불신받는 처지에 몰렸다”며 ‘줄타기 외교로의 귀환’이라고 지적했다.

불신의 눈초리는 독일 정치권의 ‘푸틴 동조자(Putin-Versteher)’로 쏠린다. 러시아의 로비스트가 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그의 총아였던 올라프 숄츠 총리로까지 향했다. 숄츠가 엊그제 미국을 방문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할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푸틴과의 동침’이란 비난까지 쏟아낸 미국 조야의 의구심을 떨쳐냈는지는 의문이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한 기고에서 각국의 외교정책 성과를 평가해 금메달을 준다면 그것은 독일 몫이 될 것이라고 썼다. 정치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미국과의 동맹도,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도 잘 관리해 안보와 번영을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다만 월트 교수는 거세진 강대국 대결에서 독일이 계속 잘해낼지는 큰 의문이라고 했다. 독일 외교가 많은 중견국가에 본보기가 될지, 반면교사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독일#줄타기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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