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란 인간의 생존조건[무비줌인 백은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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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 쿠키가 소를 다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영화는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맺어진 두 남자의 우정을 그렸다.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 쿠키가 소를 다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영화는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맺어진 두 남자의 우정을 그렸다. 영화사 진진 제공
백은하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백은하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해골이다. 개가 킁킁 냄새를 맡으며 수풀을 헤집는다. 함께 산책 중이던 여자는 긴 시간을 들여 주변의 땅을 파헤친다. 마침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명의 인골이다. 폼페이 화산 아래 박제된 드라마틱한 포옹과 달리 동네 야산 아래 나란히 누운 그들은 그저 한 손을 살며시 포갠 형상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을까. 영화 ‘퍼스트 카우’는 동물과 여성에 의해 비로소 발견된 200년 전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1820년대 서부개척시대 미국 오리건주는 아직 ‘역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러시아, 영국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모여든 개척자들은 더 많은 것을 거머쥐기 위해 황무지 위에서 야만인처럼 싸운다. 하지만 사냥꾼 무리에서 취사를 담당하는 오티스 피고위츠(존 마가로), 일명 ‘쿠키’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어딘가 다르다. 불필요한 살상 대신 딱 필요한 식재료만 구해오는 그의 행위는 수렵과 채취라기보다 자연에 모든 걸 잠시 빌려오는 듯 보일 정도다. 중국 광둥성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까지 흘러온 킹 루(오리온 리)는 머리 회전도 빠르고 수완도 좋은 작은 몸집의 이방인이다. 20세기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이라면 영웅은 고사하고 주변 인물에 머물렀을 이 캐릭터들은 21세기 미국 여성 감독 켈리 라이카트의 손길을 거쳐 영화의 중심부로 조용히 걸어 들어온다. 쿠키는 우발적인 사고 이후 알몸으로 쫓기고 있는 킹 루에게 옷과 먹을거리를 나눠주고 고난한 몸을 누일 텐트 한쪽을 내어준다. 이후 두 사람은 마을의 술집에서 다시 한번 재회한다. 이번에는 킹 루가 오갈 곳 없는 쿠키에게 자신의 오두막을 내어준다.

윌래밋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오리건주의 ‘첫 번째 소’가 당도한다. 쿠키와 킹 루는 그 암소로부터 주인 몰래 우유 한 컵을 훔쳐온다. 신선한 우유와 제빵 실력, 기름에 갓 튀겨 마지막에 꿀까지 바른 쿠키의 특제 도넛은 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줄을 서서 사 먹을 정도로 성공한다. 이 구역 거친 마초 남성들까지 ‘어머니의 맛’이라며 엄지를 치켜들고, 젖소의 주인이자 마을의 최고 실세인 팩터(토비 존스)는 티타임 손님을 위한 특별 파이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더 이상 한 컵으로 생산량을 감당할 수 없는 우유 도둑들에게는 결코 꿀 같은 엔딩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영화 ‘퍼스트 카우’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중 한 줄의 잠언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겐 거미줄, 인간에겐 우정(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얼핏 인간에 특화된 낭만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추위를 피하고 알을 낳는 둥지나 먹이를 잡는 거미줄처럼, 우정 역시 인간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조건에 가깝다. 만약 쿠키가 쫓기던 킹 루를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다. 만약 부상을 입고 쓰러진 쿠키를 원주민 노인이 발견해 자신의 오두막에 눕히지 않았다면 그는 숲 속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죽음은 잠시 유예되었을 뿐 곧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주인공들의 백골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퍼스트 카우’의 관심은 사실 생과 사의 여부가 아니라 그 사이를 채우는 삶이다.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빛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킹 루의 집에 처음 방문한 쿠키가 자연스럽게 빗질 청소를 하고 먼지를 턴 후 들꽃을 꺾어와 오두막을 장식하는 장면이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의와 친절, 생명을 가진 것들 사이의 교감과 우정에 대한 찬가, ‘퍼스트 카우’는 개척과 정복의 역사에 절대 기록되지 않았던, 야만의 시대 속에서도 우정이라는 귀한 마음을 나눈 인류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남겨진 뼈로 증명하는 영화다.

흰 소의 해가 마침내 끝나고 검은 호랑이의 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이다.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호흡을 나누고 손을 잡는 따뜻한 행위가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괴한 시대를 통과하는 가운데 지난해에는 남은 인류애마저 모두 증발할 것 같은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노골적으로 문명을 역행하는 뉴스 속에서 냉소와 위악, 선택적 고립이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퍼스트 카우’는 역설적으로 그 어떤 야만의 시대에도 우정과 연대 없이는 진정한 생존이 불가능함을 경고하고 있다. 200년 만에 도착한 ‘첫 번째 소’가 기꺼이 내어준 한 컵의 우유 속에는, 뼈가 있다.

백은하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인간#생존조건#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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