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손효림]‘깐부’ 의미 지킨 노장…가치 선택한 이들이 그립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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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내 손으로 ‘깐부’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는 없잖아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오일남 역을 맡아 ‘깐부’라는 추억의 단어를 대유행시킨 오영수 배우(77)는 이 단어가 들어간 치킨 광고를 거절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극 중 오일남은 구슬치기 게임에서 자신을 속인 성기훈(이정재)에게 마지막 구슬을 건네고 죽음을 선택하며 “우린 깐부잖아”라고 말한다.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할 때 한 팀이나 동지를 뜻하는 깐부는 신뢰와 배신, 인간성 상실과 애정 등 인간관계를 함축한 말이자 ‘오징어게임’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를 전하려 혼신의 힘을 다해 깐부 연기를 했는데 내가 닭다리를 들고 광고하면 사람들이 깐부에서 뭘 연상하겠어요.”

그의 설명이다. 50년 넘게 연극을 한 그는 형편이 결코 넉넉하지 않다. 무대 위의 그는 때론 능청스러우며 교활하고, 때론 애잔한 연기로 관객을 단숨에 빨아들이지만 연극인의 길은 배고프다. 그는 영화, 드라마에 종종 출연했지만 단역이었다. 가장인 그가 목돈을 쥘 수 있는 광고 제안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광고 출연을 아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광고 내용을 보고 판단한다고 했다.

과거 이동통신 광고를 찍은 적도 있다지만 그에게 광고의 메인 모델 제안이 쏟아져 들어온 건 50여 년 연기 인생에서 처음일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정으로 한몫 야무지게 챙길 수 있지만 그는 스스로 정한 가치를 망가뜨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평생 풍족하게 돈을 가져다주지 못했기에 이런 결정은 더 쉽지 않았으리라. “좀 너무하는 것 아니냐”면서도 결국 이해해줬다는 아내는 그가 가치를 지키게 한 일등공신이다.

임권택 감독(87)도 종종 광고 제안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쌓아온 이미지와 맞지 않는 광고는 거절한다. 임 감독은 영화로 큰돈을 벌지 못했다. 그가 사는 경기 용인시 아파트는 딱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었다. 며칠만 광고 촬영을 하면 큰돈이 들어오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아내 채령 여사(70)는 “감독님에게 누가 되는 방법으로 돈 버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런 채령 여사를 보며 임 감독이 자신의 결혼에 대해 “로또 맞았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국 영화의 역사 그 자체인 임 감독의 행보는 후배 영화인은 물론 관객인 일반인에게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물질적 풍요가 아닌 품격을 택한 그를 보며 거장의 몸가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돈이 권력이자 명예가 된 세상이다.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건 당연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박탈감은 물론 큰 상처를 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돈만 좇는 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두 노장의 선택은 반가움을 넘어 경건함까지 느끼게 한다. 세상 곳곳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만의 가치를 묵묵히 지키는 이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이 정도라도 유지되는 건, 그런 이들 덕분이라 믿는다.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오징어게임#깐부#오영수 배우#가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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