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철희]核 선제 불사용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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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그 존재 자체가 가공할 위협이다. 그 효용은 적의 핵 공격 의지를 사전에 약화시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억지(deterrence)에 있다. 실제 사용하지 않아도 사용 가능성만으로 적을 두렵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억지력이다. 1945년 일본의 두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래 많은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 대열에 끼어들기를 열망하는 이유이자, 지난 76년간 한 차례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핵무기의 주술적 위력 때문에 그 사용과 관련해선 말을 아끼며 ‘의도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절대무기가 세계로 확산하는 것을 방치해야 하는가. 아무런 지침도 없이 위험한 사람에게 핵 버튼을 맡겨둬도 되는가. 적어도 핵 공격을 받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연말에 내놓을 핵태세검토(NPR)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고민하는 문제들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이미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시작됐다. ‘핵 없는 세계’를 내세운 오바마 대통령은 선제 불사용 원칙 도입을 깊이 검토했지만 정책에 반영하지 못했다. 당시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선제 불사용을 천명하는 대신 ‘미국과 동맹에 대한 핵 공격을 억지하는 것’으로 핵무기의 ‘단일 목적(sole purpose)’을 명시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대선 때도 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핵정책 전환 검토에 당장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그것이 선제 불사용과 다를 게 뭐냐고 반발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이 동맹에 약속한 핵우산이나 확장억지 공약을 약화시켜 결국엔 러시아와 중국을 대담하게 만들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강한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자체 핵개발을 촉발해 그 지역의 군비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핵 선제 불사용은 1964년 중국이 가장 먼저 세계에 공언한 원칙이지만 중국도 최근 핵 증강에 나서면서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러시아도 소련 시절 선제 불사용을 약속했지만 공산권 붕괴 이후 그 약속을 철회했다. 북한은 선제 불사용을 거론하면서도 ‘선제적 응징’을 위협한다. 커지는 안보 불확실성 때문에도 미국의 정책 전환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선제적인 핵무기 통제론도 만만치 않아 바이든 행정부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불사용#핵무기#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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