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희균]틀린 말, 나쁜 말, 이상한 말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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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보다 바로잡기 힘든 나쁜 말
‘언어 감수성’ 없는 정치인 걸러내야

김희균 문화부장
김희균 문화부장
TV를 보는데 교양 프로그램에서 초로의 신사가 “저와 제 아내는 네 살 터울입니다”라고 말했다.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예비 신랑은 금융권에서 일하는 재원으로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직업병인지 잘못된 표현들이 귀에 걸렸다. 흔히 나이 차이로 알고 있는 ‘터울’은 ‘한 어머니로부터 먼저 태어난 아이와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 차이’를 말한다. 형제자매 사이에만 쓸 수 있는 단어를 부부 사이에 쓰면 뜻밖의 패륜이 된다. 뛰어난 사람을 가리킬 때 많이 쓰는 ‘재원(才媛)’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를 말한다. 위에 언급된 연예인은 졸지에 동성(同性) 결혼을 하는 셈이다.

이처럼 ‘틀린 말’은 화자의 의도와 다르게 이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몰라서 틀린 거라면 어휘를 배우고 고쳐 쓰면 된다. 국어사전만 들춰봐도 기본은 지킬 수 있다.

그런데 무심코, 혹은 무의식중에, 또는 숫제 의도적으로 쓰는 ‘나쁜 말’도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욕이 아니고 문장 구조로 따지면 비문이 아니더라도 쌍욕만큼이나 천박한 말들이다. 예를 들어 같은 국회의원에게 나이가 더 적고 여자라는 이유로 “야! 어디서 감히”라고 하거나, 우리 사회 원로의 고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고 하는 경우다. 여기엔 말을 한 사람의 지식, 이념, 가치관, 인성이 총체적으로 녹아 있기 마련이다.

나쁜 말의 특징은 대개 폄하와 혐오가 담겨 있고, 편견과 편 가르기를 조장한다는 점이다. 나쁜 말을 바로잡으려면 어휘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고쳐야 하는지라 간단치 않다. 실은 나부터도 ‘맘충’이나 ‘기레기’라는 말에 발끈하면서부터 나쁜 말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내게 불쾌한 말은 싫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린이’나 ‘불편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걸 반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나쁜 말을 고치려면 인지가 중요하다.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관행들이 ‘갑질’이나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많이 회자되면서 조금씩 고쳐지는 것처럼 ‘언어 감수성’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내가 나쁜 말에 대해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 계기는 3년 전 신지영 고려대 교수가 낸 ‘언어의 줄다리기’라는 책을 보면서다. 신 교수는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고 말한다. 타인과의 줄다리기, 언어 표현들 사이의 줄다리기, 이념의 줄다리기가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게 빠져 있는 함정 등을 생각해보고, 이전까지는 거슬리지 않던 표현들에 마음을 쓰며 언어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였던 각하나 미망인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여교사나 장애우라는 호칭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미혼과 기혼을 넘어 비혼과 돌싱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 등이 일례다.

이미 욕설과 막말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대선이 다가올수록 나쁜 말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인격과 가치관의 발현인 말이 상스럽고 나쁜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될 리 없다. 물론 GSGG처럼 본인은 나쁜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말’을 쓰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김희균 문화부장 foryou@donga.com


#틀린 말#나쁜 말#언어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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