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음식 맛 따지지 말라’는 김정은의 지시

주성하 기자 입력 2021-09-30 03:00수정 2021-09-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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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5차 회의가 2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새로 채택되는 주요 법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주성하 기자
코로나 봉쇄가 1년 8개월째 이어지면서 북한 내부 경제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수입에 의존하던 생필품과 식료품은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10배 이상 가격이 뛴 것들이 많다. 주민들은 아우성을 칠 힘조차 없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아직 봉쇄를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북-중 무역 재개를 위해 평북 의주비행장에 건설한 물류기지는 7월 중순에 이미 완공됐다고 하는데, 본격적인 무역 재개가 언제 이뤄질지 기약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김정은이 염장을 지르는 발언을 해 사람들이 황당해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해당 발언은 김정은의 지시를 전달하는 방침 전달 회의에서 공개됐다. 김정은의 말씀이라며 이것저것 전달했는데, 사람들이 가장 황당해했던 발언의 요지는 이렇다.

“지금 형편이 몹시 어렵지만 아무리 어렵다 해도 전쟁 때에 비기겠는가. 전쟁 때는 사탕가루, 기름, 맛내기가 없다고 싸움을 못한 게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탕가루, 기름, 맛내기를 수입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같이 논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설탕, 식용유, 조미료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발언을 통해 김정은이 현 상황을 전쟁 상황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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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는 전시법이 작동해 즉결 처형도 이뤄진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작년 2월부터 두 달 동안 북한에선 코로나 방역지침 위반에 걸려 700명이 넘게 처형됐다. 이후에도 지금까지 각종 명목으로 잔혹한 처형이 계속 이어져 왔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김정은은 지금은 전쟁 시기이니 불평불만을 가지거나 자기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또 인민을 향해 “지금 전쟁을 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궁핍하게 살아도 불만을 가지지 말라. 고작 기름 따위가 없다고 불만이냐”며 오히려 역정을 내고 있다. 방침 전달식이 끝난 뒤 사람들이 “조금 있으면 이조시대, 고려시대보다 지금이 낫다는 말이 나오겠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암울한 것은 김정은이 치른다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식용유나 조미료, 설탕이 없는 음식을 언제까지 먹고 살아야 할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이 제일 황당했던 대목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전쟁 때에 비기겠는가”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조건반사적으로 ‘니가 전쟁을 알아?’라는 생각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이제는 북한에 외부 정보가 많이 들어가 웬만한 사람들은 김정은이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스위스에서 편안하게 유학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에서 가장 영양 상태가 좋은 김정은이 먹는 것 가지고 불만을 갖지 말라고 하니 북한 사람들은 “당신은 배고픈 것이 뭔지 아는가. 당신은 기름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김정은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꼬물만큼도 없다. 본보가 단독으로 입수한 올해 7월 북-중 무역통계에 따르면 북한은 7월에 150여 개 품목, 1680만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인민을 위한 품목은 전혀 없고 김씨 일가를 위한 사치품과 식품, 의약품만 들여갔다. 예를 들면 코코아가 들어 있지 않은 사탕 2kg(209달러), 로열젤리(1480달러), 피아노 1대(2800달러), 접이식 의자 5개(500달러) 등이 수입 품목에 올라 있는데, 특정 브랜드 사탕 2kg 같은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너무나 뻔하다.

이렇게 국경을 꽁꽁 막아 놓고 자기는 필요한 것들을 다 사다 쓰고 먹고 하면서 인민들은 식용유나 조미료, 설탕이 없어도 불만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전달받는 사람들이 “개돼지들이 배만 채우면 되지 맛을 따지겠냐”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정은이 불만을 가지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불평하는 자들을 잡아다 족칠 차례다. 마침 28일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5차 회의에선 청년교양보장법이란 것이 채택됐다. 가장 불만이 많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젊은 세대부터 확실하게 고삐를 죄겠다는 의도다. 전 세계가 코로나 와중에도 물류 교류를 하며 살고 있는데, 유일하게 국경을 폐쇄하고 백신 지원도 거부하며 홀로 치르고 있는 김정은의 ‘셀프 전쟁’은 과연 언제 끝날지 암울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음식 맛#김정은#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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