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완준]美에 드러냈던 文의 결기, 北에는 왜 보여주지 않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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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정치부 차장
윤완준 정치부 차장
올해 1월 외교안보 당국자들에게 함구령이 떨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의 2018년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 계승을 조 바이든 행정부에 직접 요구하지 말라는 것.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적폐청산’이 이뤄지던 그때 바이든 행정부는 싱가포르 성명을 “정책적 실패”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싱가포르 성명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체가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들은 판단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대북 실무협상을 총괄한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을 통해 싱가포르 성명 계승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1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깜짝 놀랐다.

“싱가포르 선언에서 다시 시작해 보다 구체적 방안을 이루는 대화 협상을 해나가야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성과를 계승해 발전시켜야 합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바이든 대통령에게 싱가포르 성명 계승을 요구한 것. 문 대통령의 기자회견 원고에도 없던 내용이었다.

정부 내부에서 우려가 나왔지만 문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4월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폭넓은 목표를 설정한 싱가포르 합의를 폐기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 외교안보 참모들은 조마조마했다.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트럼프 지우기’에 한창인 바이든 행정부가 새 대북정책에서 싱가포르 성명을 빼놓는다면? 한미 관계가 삐거덕댄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5월 초부터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성명을 언급하자 당국자들의 마음이 놓였다. 한미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싱가포르 성명에 기초한 대화”를 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싱가포르 회담을 “사진 찍기용”이라고 비판했던 걸 떠올리면 극적인 변화였다. 우리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가 한국의 대북 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 당국자는 “미국도 속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이더라도 한국 정상이 강하게 의지를 내보인 것은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한미 관계에 역효과가 될 수 있다는 부담을 무릅쓰고 참모들의 만류에도 결기를 보였다. 싱가포르 성명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원칙과 직결된다고 봤던 것이다. 외교안보 정책의 원칙을 대통령이 직접 밝히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 국방부가 “연례적이고 방어적”이라고 해온 한미 연합훈련도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원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다. 싱가포르 성명 계승과 달리 한미 훈련에 대해서는 문 대통령의 생각이 들리지 않는다. 북한은 2일 한미 훈련을 이유로 남북 통신연락선을 다시 차단했다. 이번엔 주한미군 철수 주장까지 나아갔다. 주한미군 철수는 문 대통령이 강조해온 종전선언의 힘을 뺄 수 있는 민감한 주장이다.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미국에 설득하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상관없을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미 훈련을 빌미로 통신선을 끊은 북한 행위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었다. 대통령 결기가 북한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보는 걸까.

윤완준 정치부 차장 zeitung@donga.com
#문재인 대통령#싱가포르 성명 계승 요구#결기#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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