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철희]3년 前 판문점의 봄날

이철희 논설위원 입력 2021-04-27 03:00수정 2021-04-2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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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두 정상이 나란히 산책을 하다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눈 판문점 도보다리 대화. 새소리 바람소리만 깔린 35분의 롱테이크 영상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입 모양을 읽는 구화판독 전문가의 분석 결과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핵무기’ ‘미국’ ‘트럼프’ 같은 단어들이 포착됐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열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로 미국을 어떻게 상대할지 묻고 문재인 대통령이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3년 전 북한 최고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은 김정은에게 판문점 회담은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회담을 목전에 두고 전격 취소를 통보해 무산 직전에 갔을 때 김정은이 부랴부랴 문 대통령을 찾은 곳도 판문점이었다. 이듬해 하노이 북-미 담판이 결렬된 뒤 남북미 3자 정상의 깜짝 회동도 벌어졌지만, 판문점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분단과 대결을 상징하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한반도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 우여곡절의 이벤트만 몇 개 더해졌을 뿐이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다.’ 두 정상이 낭독한 판문점선언의 흥분과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5개월 뒤 평양 정상회담에선 남북 간 실질적 종전(終戰)을 이뤘다는 평가까지 나왔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 대화의 장기 교착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북 간 ‘전면적 획기적 진전’은 금세 ‘단계적 돌발적 후퇴’로 바뀌었다.

▷특히 북한은 판문점선언을 남북관계를 대결로 전환하는 핑곗거리로 이용했다. 지난해 6월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의 중지’를 담은 내용을 들이밀며 판문점선언의 성과물인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켜 버렸다. 3개월 뒤엔 서해상에서 우리 국민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판문점선언도 7·4, 6·15, 10·4 같은 과거의 숱한 남북 합의문처럼 어느덧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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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주인은 남북이라지만 미국의 의지 없이는 어느 것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 공개를 앞두고 남북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요즘이다. 그간 북한의 온갖 욕설을 들은 문 대통령이다. 트럼프 시절 대북접근을 두고 “변죽만 울렸다”고 했다가 발끈한 트럼프로부터 험담까지 들었다. 중매자로선 술 석 잔과 뺨 석 대 사이에서 아쉬움의 표현도 쉽지 않은 예민한 시기인 건 분명하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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