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표할 자격이 있는가[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0-11-28 03:00수정 2020-11-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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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스윙 보트
이정향 영화감독
미국 뉴멕시코주의 소도시 텍시코. 인구가 1000여 명밖에 안 되는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되는 대로 살아가는 이혼남 버드. 그에게는 당차고 똑똑한 초등학생 딸 몰리가 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일. 누가 뽑히든 자신의 구차한 삶이 변할 리 없다고 믿는 버드에게 선거는 남의 일이지만, 몰리는 아빠에게 투표는 국민의 의무라며 꼭 투표하기를 당부한다. 하지만 버드는 술에 취해서 투표장에 못 갔고, 몰리는 마감 직전에 몰래 들어가 아빠 대신 투표한다. 하필 그때 정전으로 투표기가 꺼지고 겁을 먹은 몰리는 도망친다.

이날 밤, 미국 전역에서 난리가 난다. 아직 개표 중인 뉴멕시코를 제외한 현재, 대선 후보 두 명이 동점이다. 뉴멕시코주에서 이긴 자가 선거인단 5명의 표를 가져갈 수 있는데 결국 여기서도 동점이 된다. 하지만 텍시코의 딱 한 표가 정전으로 인해 집계가 되지 못한 사실이 발견되고 본의 아니게 그 주인공이 된 버드는 열흘 후에 재투표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두 대선 후보의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된다. 국민들 앞에서 내걸었던 공약들은 무시한 채 단 한 장의 스윙 보트(부동표)를 위해 판을 다시 짠다. 덕분에 버드는 온 국민의 관심을 받는 슈퍼스타가 된다.

“이기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뜻을 품었어도 펼칠 수가 없어. 무조건 이겨야 해.” 이 말 속엔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법이어도 괜찮다는 무서운 의도가 숨어 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상관없다는 비윤리적인 말이 상식으로 통하는 일번지가 바로 정치판일 것이다. 얼마 전 대선을 치른 미국에서 재선에 도전한 대통령이 개표 결과에 승복 못 하겠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진짜로 부정이 있었다면 엄청난 문제지만 이 사건을 대하는 주변의 자세도 놀랍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된다면 설령 부정이 있어도 괜찮다는 입장이 적지 않다. 국민이 청렴한데 정치권만 불한당일 수는 없다. 거대한 부정이 있어도 조용히 묻힐 수 있는 건 국민 대다수가 내 편이 저지른 부정은 부정이 아니라고 여겨서다. 그 대가로 내가 이익을 본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있기에 가능한 거다.

영화 속 버드는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자신에게 한 표를 행할 자격이 있는지를 반성하며 신중해진다. 이 나라의 진짜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버드의 고백이 남 말 같지 않기에, 나 또한 진지한 고민 없이, 또는 이기적 계산으로 던진 표는 없었던가 되돌아본다. 그의 한 표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짓는 상황이라 그의 선택이 어떨지 흥미진진하게 봤다. 그런데 내가 선거 때마다 던진 표들도 그와 똑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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