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법관 종신제의 종말[글로벌 이슈/하정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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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의 타계 8일 만인 이달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강경 보수 성향의 에이미 배럿 판사를 후임으로 임명하면서 대법관 종신제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반대론자들은 평균 수명 증가와 사회 변화에 발맞춰 대법관 역시 임기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싱턴=AP 뉴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의 타계 8일 만인 이달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강경 보수 성향의 에이미 배럿 판사를 후임으로 임명하면서 대법관 종신제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반대론자들은 평균 수명 증가와 사회 변화에 발맞춰 대법관 역시 임기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싱턴=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2014년 3월 미국 진보 성향 법학자 어윈 처머린스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법과대학원 교수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도발적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존경하지만 민주당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후임자를 뽑아야 한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 지위를 잃을 수 있고 2년 후 대선에서 패할 수도 있다. 올여름 사퇴해 달라”고 썼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긴즈버그가 신봉해온 가치와 완전히 다른 이념을 지닌 이가 대법관에 뽑혀 미 사회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크니 본인의 신념을 위해서라도 지금 물러나라는 호소였다. 당시 처머린스키 교수 말고도 진보 진영에서 이런 주장을 펴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본인이 사퇴를 거부하면 대통령이라고 해도 미 헌법이 보장한 대법관의 종신 임기를 바꿀 수 없으니 스스로 용단을 내리라는 압박이 상당했다.

긴즈버그는 여성지 엘르 인터뷰를 통해 “내가 물러난다 해도 대통령이 나 같은 사람을 또 임명할 것이란 생각은 잘못됐다”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자신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당당함의 발로였다. 그는 이달 18일 타계할 때까지 대법관으로 재직하며 종신(終身) 임기를 지켰다. 하지만 자신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이가 후임으로 지명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재집권 첫해인 2013년부터 긴즈버그의 사퇴를 내심 바랐다. 1993년 60세로 대법관에 오른 그가 이미 20년을 봉직했고 수차례 암 수술을 받아 건강 우려도 큰 만큼 젊고 건강한 진보 성향 대법관으로 대체하겠다는 속내가 강했다. 민주당 중진이자 긴즈버그와 가까운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을 보내 이런 뜻을 전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대법관 지형이 보수 우위로 바뀌면서 진보 진영 전체가 “하루라도 더 살아 달라”며 그의 장수를 기원했지만 오바마 시절에는 욕심이 과하다는 평가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4번의 암 수술과 수차례 낙상 사고에도 87세까지 종신 임기를 지킨 긴즈버그 대법관의 선택은 물론 존중받아야 한다. 자진사퇴 논란이 불경스럽게 느껴질 만큼 그가 미 사회와 세계 여성계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는 점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공공연히 반트럼프 성향을 드러내며 ‘새 대통령이 내 후임자를 지명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긴 긴즈버그의 결정은 상원 다수당 위치를 이용해 평균 70일이 걸리는 대법관 인준을 약 한 달 만에 해치우려는 트럼프 대통령 못지않게 당파적이고 정치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미국은 국민의 기대수명이 38세에 불과했던 1776년 건국 당시 사법권 독립을 위해 대법관 종신제를 택했다. ‘지혜의 아홉 기둥’이라 불릴 정도로 대법관 9명이 절대적 존경을 받고, 공화와 민주 양당이 집권할 때마다 최대한 많은 대법관을 새로 임명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 역시 개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종신제란 제도 때문이다.

2020년 현재 기대수명은 78.9세로 늘었고 18세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성소수자, 이민, 건강보험 등 각종 복잡다단한 문제도 속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 1명이 3억3000만 명의 미국인을 대표할 9명을 고른다는 것, 미 대법원이 다른 나라와 달리 최종심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동시에 지녀 이들의 판결이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회 변화에 발맞춰 종신제 변화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공영 PBS방송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77%가 “대법관 임기를 제한해야 한다”고 답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워싱턴 정계에서는 ‘대법관 임기를 18년으로 정하자’ ‘대법관 수를 13명으로 늘리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된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4년 임기 중 단 한 명의 대법관도 지명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기간 벌써 3명의 대법관을 골랐다. 특정 대통령이 ‘운’에 의해 사법부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대법관 종신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져야 할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미국#대법관#종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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