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뿐 아니라 채송화도 국화도 보고 싶다[동아광장/최인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빠르게 늘어난 개성 가득 동네책방
도서정가제 폐지 앞둬 다양성 위협
지성 충만한 작은 공간 지켜내자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책방 주인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고요한 책방에 있기가 민망해 더러 일찍 퇴근한다. 시간이 생긴 김에 긴 호흡의 책을 편다. 김정섭의 ‘낙엽이 지기 전에’와 마이클 돕스의 ‘1945’.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다룬 책이다.

코로나19 이후 자영업자들은 아무런 보호 장구 없이 태풍을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나니 지금 우리의 처지가 최악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20세기만 해도 수천만 명이 희생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치렀고 그 뒤로도 국지전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대한민국의 베이비붐 이후 세대는 어떤 전쟁도 직접 겪어본 적이 없다.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내몰리지도 않았고 쳐들어온 적에게 쫓겨 피란을 간 적도 없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늘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내는 길을 찾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숱한 어려움을 뚫고 당도했다. 우리에겐 어려움에 쉽게 지지 않는 굉장한 면역력이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반쯤 무너져 가던 마음을 다시 추스를 힘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 매출이 확 꺾인 것을 보자 다시 마음이 급해진다. 그러다 다른 동네책방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우리 책방은 자영업의 1차 고비라는 2년도 넘겼고 이름도 꽤 알려져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대다수 동네책방들은 존폐를 걱정할 만큼 힘들다. 그런데도 요 몇 년 사이 새로운 유형의 독립 책방, 돈 버는 게 목표라면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작은 책방들이 빠르게 늘었다. 2019년 한 해에만 184곳이 새로 생겨서 작년 말 기준으로 551곳이다. 한 주 평균 3.5곳이 새로 문을 연 것이다. 물론 폐업도 적지 않아 매주 한 곳씩 문을 닫았다.

13세 이상 우리나라 독서 인구 비중은 50.6%로 2013년 이후 계속 줄고 있고 출판사들은 매년 단군 이래 불황을 경신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동네책방은 어떻게 그렇게 늘어난 걸까. 그 뒤엔 부분 도서정가제라는 정책이 있었다. 처음엔 모든 서점이 정가대로 책을 팔았다. 그러나 예스24와 알라딘 같은 온라인 서점들이 나오면서 정가의 20∼30%를 할인해 주었다. 게다가 한 권을 사도 무료 배송이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학교 앞 골목마다 있던 작은 서점들이 사라졌다.

그러자 2014년 11월부터 부분 도서정가제가 시행됐다. 책값을 10%까지 할인할 수 있게 바꿨다. 온라인 서점들이 10% 이상 깎아줄 수 없게 되면서 동네책방과의 가격 차가 줄었다. 이 덕에 작은 책방들이 하나둘 생겨난 거다. 그런데 이 법은 한시법이라 올해 11월이면 끝나고 연장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부분이 아니라 완전 정가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판에 만약 연장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동네책방은 꼭 있어야 할까? 책방의 역할이 책 파는 게 전부라면 없어도 되겠다. 그렇지 않음은 책방에 오면 금세 알 수 있다. 온라인 서점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 서점마다 펼쳐진다. 사람들이 둥지를 찾아 모여들듯 책방에 모여 좋아하는 저자를 직접 만난다. 책 읽기 모임을 하고 토론을 하며 음악회를 연다. 머릿속이 비즈니스와 숫자로 꽉 차 있던 사람들이 리프레시하고 책에 빠져든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얼굴 표정이 다르다.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낸 사람의 표정, 아웃풋만 하다가 인풋을 해 충만해진 사람의 표정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책방이 하는 일은 그저 책을 파는 게 아니라 책으로 ‘지적이고 우아하며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온라인 서점이 동네책방의 경쟁자이니 그들을 막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양성을 지키자는 얘기다. 동네책방들은 주인장의 남다른 생각과 개성을 뿜어내기 마련이라 책방마다 책의 큐레이션도, 많이 팔리는 책도 다 다르다. 우리도 매달 베스트셀러를 집계하는데 지난달엔 서범상의 ‘노마드 인터뷰’,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다시 성경으로’ 같은 책들이 높은 순위에 들었다. 동네책방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책들이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해서 장미꽃만 피는 세상은 따분하고 기괴하며 재미없다. 채송화도 국화도 해바라기도 피어나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도서정가제다. 책방 주인들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운영하는 한 다양성은 자연스럽게 꽃핀다. 정책을 만드는 분들은 그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주시라. 작은 책방들이야말로 다양성을 지키는 보루이고 로컬 문화가 살아나는 곳이다.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동네책방#도서정가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